기정의달 설교_“사랑의 이유”

요한일서 4장 7-11절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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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디서 배웠을까?”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실 굉장히 쉽게 쓰여집니다. 수 많은 노래들이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심지어 영화나 다양한 작품 속에도 단골처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성경 안에서 ‘믿음’ 이라는 단어는 250번 정도 등장하는 반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780번이나 나옵니다. 세상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우리가 흔히 ‘내리사랑’ 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사랑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뜻인데요, 좀 전에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축복을 받는 모습이 언제나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왜 사랑받는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먹으며 자라갑니다.
결국, ‘사랑’은 나를 먼저 사랑한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부모를 통해 배웁니다. 부모도 과거에 자신이 자녀였던 시절, 자신의 부모를 통해 배웠던 것을 다시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와 마주하게 됩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결국, 사랑의 시작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요한일서 본문을 함께 살펴봅니다.
함께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짧은 본문 안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특히나 요한서신에서는 사랑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열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일서를 살펴보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제가 최근에 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려하기보다 ‘사랑'을 하기 위해 노력하라.
저는 이 말이 무엇일지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 없이 사역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보니 사랑보다 사역을 하는 것이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청년시절에 항상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를 했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년회에 올라가면 성가대로 가거나 혹은 교회학교 교사로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음악에 큰 재능이 없던 것도 있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사가 조금 더 어려운 사역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성가대는 저 하나 음을 잘 맞춰서 성가곡을 부르면되지만, 교사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임영민 목사님과 안세나 자매, 안지은 사모님이 참 수고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나름의 감사의 표현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는 사물을 대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음을 쓰기보다 몸을 쓰는 것이 더 편한 유혹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 위에 사역이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랑이 최우선으로 고려되고 추구되어야 할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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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늘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우리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먼저 본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사도요한이 누구인지 먼저 살펴보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요한은 헬라어로 '요한네스'라고 하며 '여호와는 은헤로우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유일하게 12제자중 순교를 하지않고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살아나 성령님의 영감을 깊이 받은 사도가 되어 요한계시록 및 요한 1.2.3.서와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 중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이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죽음의 위협과 핍박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을 독살시키려는 음모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합니니다. 이 전설은 뱀이 그려진 성찬배가 요한을 상징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 다른 전설은 핍박받는 동안에 끓는 목욕탕에 던져졌으나 요한은 그 속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사도요한이
체코의 종교개혁자 ‘제롬’의 말에 의하면, 사랑의 사도 요한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서 장시간 설교하는 것이 힘들어졌을 때, 가끔씩 나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마디씩 권면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했다고 한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할 때마다 온화한 얼굴로 ‘나의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반복했는데, 항상 같은 말만 반복해서 하니까 에베소 교인들은 식상한 나머지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사도님, 왜 똑같은 말씀만 계속 되풀이하십니까?’ 그때, 사도요한은 ‘첫째는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이것이면 충분합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요한의 이러한 마음이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사랑해야하는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적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집사, 권사, 예배 인도자, 반주자 등은 우리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맡은 역할입니다. 우리의 기본적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신생아들도 부모를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적어도 외모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는 부분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성품이 우리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형상’(image)이란 무엇인가요?
“형상”은 헬라어로“에이콘eikon”인데 이 말은 “닮다. 같다”을 뜻하는“에이코eiko”에서 유래한 것으로“형상, 모양”을 말한다.이 말에서 오늘날“아이콘”으로 변하여 사용되고 있다.“아이콘icon”은 우상시되는 특정인물, 또는“상징적 인물“ 을 말한다. MZ세대의 아이콘 뭐 이런 식입니다. 이 말은 MZ세대를 대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의 아이콘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을 대표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 보실까요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두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사랑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야기는 아마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동일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한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시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11절은 말합니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러분은 사랑이 많은 분인가요?
제가 만난 어떤 사람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자신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아기들을 너무 좋아해서, 보기만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막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것? 아기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안 예쁜 아기가 어디 있나요?
어떻게 그렇게 조그만 눈코입을 가졌나 바라보면 예쁩니다.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들은 그냥 그 자체로 다 예쁩니다. 웃어도, 울어도 예뻐 보이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충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 사랑을 언뜻 보면 사랑이 많은 것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누구나 하고 있거나 혹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런 사랑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훨씬 폭 넓게, 그리고 깊이있게 접근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감정적인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감정이 풍부한 날은 예전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사람들을 대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런 감정이 없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고 냉정하게 관계를 대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쌀쌀맞게 대하면, 저 사람 왜그래 무슨 일 있데? 남자친구랑 헤어졌데, 아이고 그렇구나 이렇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것보다는, 우리 의지와 혹은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은 감정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 안에서 우리의 의지를 발휘하고 노력을 통해 이러한 사랑을 시도합니다.
감정으로만 이루어진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우리 의지와 태도가 함께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가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명령 중 하나인 것입니다.
계명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10가지의 계명이 적힌 돌판을 받게 됩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계명 곧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바리새인이 등장할 정도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실패였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 없이 계명만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잠언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이 말은 무엇입니까? 돌판에 새겨진 말씀으로는 삶이 바뀌지 않는 겁니다. 돌판에 새겨진 계명은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판에 하나님 말씀이 새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 만으로는 우리 삶이 바뀌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종이에 적힌 말씀이 아니라, 우리 마음판에 말씀이 새겨져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고 다니는 성경 책 안에만 있는 말씀으로는 우리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무감으로 하는 봉사는 지칩니다. 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헌신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우리는 의무감이 아닌,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켜야합니다. 그럴 때에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가능합니다 .
마지막 셋째로, 사랑은 우리의 신앙을 지켜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요한복음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성경적인 지식이 있는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어디 출신인지 등의 외부적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것이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바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의 신앙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치매에 걸린 권사님 심방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37살, 담임목회를 처음 했을 때라서 모든 것이 익숙치 않는데, 심방 요청을 받았습니다. 교회 집사님께서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시는 자신의 어머니를 심방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색하게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아시겠지만, 치매환자는 사람을 못 알아봅니다. 자신의 딸에게도 누군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색해하는게 느껴지셨나봅니다. 자신을 익숙하게 대하는 딸과 다른 집사님들에게는 말을 붙이는데, 어색해하는 저와는 대화를 피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치매환자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서였습니다. 어떤 분이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병원에 가느냐, 요양병원에서 알아서 다 돌봐주는데,, 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 선한 집사님께서 폭발을 했습니다.
“엄마가 나를 못 알아봐도, 나한테는 우리 엄마에요. 내가 우리 엄마를 아는데 어떻게 모른척해요!”
그 집사님의 말로 주변이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수습을 했습니다.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저는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이 이와 비슷했을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수난으로 로마 군인에게 끌려갈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나마 베드로만 먼 발치에서 따라갔는데, 어떤 한 여종이 너도 예수당이지? 이 한 마디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른척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른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활 후 다시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실 때,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teleio’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이루다, 완성하다, 끝까지 다다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텔레파시, 텔레폰 등이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서 파생한 단어, ‘teleios’라는 말이 바로 ‘끝까지’라고 번역되었는데, ‘완전하게’, ‘흔들림없이’ 라고 번역이 됩니다. 즉, 어떤 상황에 상관 없이,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없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신을 알면서도 완전하고 흔들림없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그물을 집어들고, 사도이기를 거부하고 떠났던 당신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셔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것입니다. 또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또 손을 내밀어 주는 것입니다.
저 사람 나에게 실수를 했어. 다시는 만나지 않을꺼야 하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할 수 있는한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동일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실수를 하더라도, 그래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게 쉽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용서하고 배려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모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라는 생각이 들면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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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경험할 때, 우리가 비로소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셨던 진정한 사랑을 삶 속에서 해 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 하시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셨네
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 하듯이 나도 널 사랑하며 섬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