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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설교_"믿음으로 바라보기"(사도행전 3:1-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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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라보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사람들마다 다른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결론을 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라보는 대상에서 오는 차이가 아니라, 바라보는 당사자의 입장이나 태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 우주선 그림에서 가장 앞에 있는 우주선은 무엇일까요? 여기서도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그리고 특히 동양과 서양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중심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해석은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서양은 자신을 중심으로 바라보고, 동양은 타인 중심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결국 우리는 바라봄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 앞에 섭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바라보기'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눈은 우리 앞에 보여지는 시각정보를 뇌로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어떤 지점에서 보느냐, 기준점에 따라서 우리 뇌가 인식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관점이라고 합니다.
관점(觀點, viewpoint)을 영어로 뷰포인트라고 하는 것은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물도 보는 방향,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생각하는 관점과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눈높이’라는 표현도 있고, ‘거꾸로 보는 역발상’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체급이나 실력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와의 싸움을 다윗과 골리앗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골리앗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압도적인 체격의 우위도 아니고, 무기의 탁월한 기량도 아닙니다. 다윗의 승리 비결은 관점의 차이에서 나왔고, 관점의 차이는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정탐꾼을 선발했는데 갈렙은 유다 지파 대표로,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대표로 다른 지파 열 사람과 함께 선발됐습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모든 정탐꾼이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할 때 가나안의 실상을 정확히 보고하고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는 제안을 했던 사람이 바로 갈렙입니다.
이때 갈렙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그리고 45년의 세월이 흘러 가나안에 입성하게 됐을 때 갈렙의 나이는 85세가 됐습니다. 이때 지도자는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가 됐습니다. 여호수아 14장을 보면 갈렙이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호수아 14:11-12)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같은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때에, 다르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본다라고 하는 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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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살펴보는 본문은 사도행전 3장입니다. 성경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각 권별로 따지자면 성경은 총 66권입니다.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저에게 성경 중에 어떤 부분을 가장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야고보서, 요한서신 등이 좋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언젠가는 사도행전에 관심이 가는 때가 있을겁니다.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종종 초대교회는 어떠했을까 하는 질문을 해봅니다. 저희가 아이들이 많아서 온가족예배를 한달에 한번 가져보지만, 저는 초대교회가 이와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단위로 모여서 왁자지껄한 그런 예배의 모습 말입니다.
교회의 시작을 봐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내가 속히 오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관점으로 볼 때,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예배를 드리며 서로 교제하며 존재했던 것이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그 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교회들마다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에서 오는 분열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신약 전반에 걸쳐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 말의 핵심은 우리의 이런 갈등이 예수님의 복음 앞에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육신의 눈을 벗고 이제는 다같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사도행전 3장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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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함께 모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진리였음을 깨닫게 되면서, ‘주여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역사하소서’ 라고 기도할 때,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경험하면서 그들을 주축으로 교회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정시기도시간에 맞춰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키는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을 하면서 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그가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의 시작은 기도시간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제 9시에, 지금으로 말하면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들어가는 순간에 여러사람이 한 사람을 메고 오는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성전의 각 문 마다 이름이 있었는데, 이 문은 아름답다고하여 ‘미문’이라는 이름이로 불리워진 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을 시작합니다.
[1]
오늘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지만, 현재까지 그의 상황은 나면서 부터 걷지 못한, 즉 다시 말해, 어떤 사고에 의해서가 아닌 선천적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해 이곳 성전 입구에 와서 구걸을 하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어둡고 비참한 인생 가운데 예수님께서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던 그가, 예수 이름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가진 육체의 한계, 상황의 한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빛이 되십니다. 우리가 가진 여러 한계들, 절망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그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 인생의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빛과 소망이 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던 자리입니다. 바로 성전입구입니다. 그는 비록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지만, 성전 입구에만 머물러 있었을 뿐, 그는 성전으로 들어오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는 제 9시 기도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서 온 것입니다. 그는 직접 기도하기보다, 기도를 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보다, 은혜를 받은 다른 사람들의 돈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매일 성전 문 앞에 나와서 구걸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기도를 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 기도를 마치고 성전을 나오는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만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을 뿐, 함께 기도하러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어서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8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이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서 역사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가며, 예수님이 만드신 기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을 분명히 주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기적은 기적, 그리고 나는 나일뿐.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는 그저 매일 똑같이 구걸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몸만 주저 앉아 걷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도 혼자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신뢰는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기도는 하더라도 정말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믿음이 주저앉아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직접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어떠한 이유로든 낙심하고 있다면, 나의 상황 때문에 주저 앉아 있다면, 이제는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에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종류의 사람 중에 두 번째 사람은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을 매일마다 성전 앞까지 메고 왔던 사람입니다. 본문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본문을 잘 관찰해보면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걷지 못하는 자가 날마다 성전에 나와 있다는 표현은, 누군가가 매일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메고 오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휠체어 같은 것도 없었을테니 아마 옛날 한국의 ‘가마’와 같은 것으로 메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다 데려다만 준 것이 아니라, 다시 데리고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매일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첫째로, 아마도 그 사람들은 봉사정신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그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정시 기도 시간에 맞춰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그들이 기도하러 가는 길에 그 사람을 위한 봉사를 했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것입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그를 또한 돌봐주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면서, 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괜찮은 사람들 때문에 걷지 못하는 자도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오는 길에 걷지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던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몰랐을까요? 혹시 잘 모른다해도, 적어도 걷지 못했던 그 사람보다는 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자리로 데리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은 곳으로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의 자신의 삶을 바꾼다는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주님의 새로운 역사보다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익숙한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일 수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도 많고, 사람도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거나 바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시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팬인가 제자인가' 라는 책을 쓴 카일 아이들먼 이라는 목사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던 때, 평상시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교회를 떠나겠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어서 왜 그러느냐고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자, 자꾸 내 삶이 흔들리는 것 같아 그게 싫어서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시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히려 신앙생활을 착실히 오래해온 사람들에게 발견될 때도 있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더 이상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본문처럼 평생 봉사하며 걷지 못하는 자를 돕지만, 그를 은혜의 자리로 데려가진 못합니다. 그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틀을 깨지 못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신앙생활은 나의 신앙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넘어서서,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은혜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하는 사람은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게 됩니다. 그 사람이 구걸했던 은과 금, 재물,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걷지 못했던 그에게 걸을 수 있는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새로운 삶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진실로 믿을 때에 가능합니다.
본문의 표현을 보면 베드로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나옵니다. 정말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고 보여집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여러분의 삶에 이런 역사가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이 사람을 일으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일으킨다는게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올라갔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날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었는데, 정시기도 시간을 지키는 베드로와 요한이 과연 이 사람을 오늘 처음 만났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지금까지는 걷지 못하는 이 시람을 그저 지나쳤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왜 어느날 갑자기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을 일으켜야 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3장입니다. 바로 직전의 사도행전 2장에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의 역사가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앉은뱅이에게 어떻게 나타났나요?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손을 내밀었고 앉은뱅이는 그 손을 잡은 것입니다. 어떤 거대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손을 내밀고 잡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주도에 살다보면 종종 의미있는, 혹은 의외의 만남들이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이 있는데, 하루는 어떤 형제와 함께 약속에 나왔습니다. 당연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대화를 나누다보니 예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교회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10년 만에 교회로 돌아올까 고민을 한다고 하여, 선교사님은 해외에 살고 있으니 저와 만남을 이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몇 차례 만나서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대화 중에 그 형제는 자신이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떠났던 것도 자신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최근 자신의 상황이나 만남을 보았을 때 교회에 다시 나가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다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억지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손을 내밀면 그것을 잡는 것 정도는 합시다. 그리고 그 형제가 사는 지역의 교회를 함께 알아보고 추천을 해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믿음이라는 것이 꼭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시려고 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도망가지 않고, 숨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응답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 뱅이는 오늘 내가 꼭 일어나겠다고 다짐을 하고 미문에 앉아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구했지만 누군가 나타났고, 비록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금과 은이 아닌 다른 것을 준다는 말에 거부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몸을 맡긴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내 인생에 내미신 손을 잡는 것입니다. 거부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일어난 앉은뱅이.. 그 전까지 매일 성전에 나와 구걸했던 인생이 어쩌면 얼마나 허무했을까요. 내가 조금만 빨리 주님의 손을 붙잡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허무했던 우리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에 몸을 맡겼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손을 내미실 때 우리를 맡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오셨네>
허무한 시절 지날때 깊은 한숨 내쉴때 그런 풍경 보시며 탄식하는 분 있네
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리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억눌린자 갇힌자 자유함이 없는자 피난처가 되시는 성령님 계시네
주의 영이 계신곳에 참자유가 있다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 오셔서 그나라 꿈꾸게 하시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 오셔서 그나라 꿈꾸게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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