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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설교_"주가 쓰시겠다"(누가복음 19:28-3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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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설교_"주가 쓰시겠다"(누가복음 19:28-38)

Jake's Blog 2025. 4. 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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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행복’이라는 부분이 참 중요합니다. 

행복에 관한 연구 - 기본적으로 인간은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소유라는 행위가 인간에게 만족감을 줍니다. 그래서 자꾸만 무언가를 쌓아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소유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1. 많은 것을 소유 - 소유하는 양에 의미를 둔다.
  2. 좋은 것을 소유 -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3. 이 세상에 몇개 없는 것을 소유 - 자신도 세상에 몇 개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에 따르면,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누아투 2. 콜럼비아 3. 코스타리카 4. 도미니카 공화국 5. 파나마 6. 쿠바 7. 온두라스 8. 과테말라

한국은 102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 결국 소유와 행복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자녀된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이 주님께 어떻게 쓰임 받는가에 따라서 삶의 의미가 정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 500불짜리 공기

미국 헐리우드에서 이색 경매를 했습니다. 뚜껑이 달린 평범한 유리병이 500불에 팔렸습니다. 브래드피트와 안젤리나졸리가 걸어갈 때, 그들의 숨을 담았다면서 경매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월마트나 코스코에서 1불이면 사는 물건인데, 이렇게 높은 가격에 거래된 것은 결국 누구와 관련이 있는가로 결정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귀한 인생이 되는 것은 바로 누구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와 유사합니다. 즉, 우리의 인생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은 어떠한 소유보다 뛰어난 일이며, 천국을 소유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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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 쓰임 받은 한 나귀가 등장을 합니다. 만일 성경에도 경매가 있었다면, 아마도 성경에 등장하는 동물 중에 가장 비싼 몸값을 지닌 동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종려주일에 함께 살펴보는 본문입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걸으시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작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를 준비하는 본문입니다. 

 

먼저 종려주일이라는 뜻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을 올리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요 12:13) - 종려나무잎 = 야자수 잎

 

그래서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이고,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Holy Week)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난 주간 금요일을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하며, 전통적으로 금요일 저녁에 성금요일 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이 됩니다. 

 

종려주일의 유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친 것에 기인합니다. 전통적으로 종려나무는 왕을 상징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쳤는데, 그 뜻은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hoshiʽah nna', אנּ העישׁוה)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종려주일에는 대부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의 성경구절을 주로 살펴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그리고 하나ㅅ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이번 한 주간의 행적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기적도 없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예수님은 고난을 겪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용하신 나귀를 준비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을 아시고, 제자들이 배신하고 떠날 것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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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섬김의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를 섬기고 구원하러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종려주일은 그 고난의 길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 잔이 지나갈 수 있거든, 지나가게 하시고 다만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길을 아시지만 지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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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말 중에 ‘알면서도 속아주다/알면서도 당해주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완아 엄마 아빠 없는 애들이 있어. 그 친구들은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지 뭐..” 

잘 모를 때는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알면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인이 된 우리들이 우리 일상의 삶 속에서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이 아닐 때는 상관 없지만, 특별한 일이나, 속아주었을 때의 리스크가 큰 일이라면, 우리는 왠만하면 속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값 비싼 거래를 할 때,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거나, 집을 계약할 때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열심히 곳곳을 살피고,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내용이 있을지 몰라서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자동차 딜러나, 집주인이 바가지를 씌우는데 알면서도 속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성경 본문을 보면, 특별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는 모든 것을 알면서 가셨습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가고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 위에 못박히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가셨을까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사랑의 마음으로 그 길을 묵묵히 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시고도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십자가 사건에 댈해서도 자신이 겪을 고난과 고통, 십자가 위의 죽음을 아시고도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은 그 고통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 가운데 꼭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정말 느껴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함께 읽은 마가복음 11장 본문에서는 작은 나귀 한 마리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나귀를 볼 기회가 별로 없어서 어떤 분들은 나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수도 있는데, 화면의 사진처럼 작은 말과 같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이 작은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를 구하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귀는 보통 짐을 싣는데 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귀들은 평생 짐을 지고 힘든일을 하는 그런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귀는 예수님께 부름받아, 주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며, 소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원래 이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가진 나귀 한 마리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했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받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나귀 주인처럼, 자신의 것을 내어 줄 때 쓰임 받을 때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든 권위를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드리는 기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과거에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제목인데요, 나귀를 데리고 올 때 사용했던 “주가 쓰시겠다”는 표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되시니까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당연히 내어 드리는 것이 맞을텐데,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듣고 나귀를 내어드리는 마음은 무언가 마냥 기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귀의 주인은 정말 기쁜 마음으로 드렸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약간은 강압적으로 데리고 온 것 같은 상황에서 나귀주인이 별다른 반응 없이 자신의 나귀를 드린 오늘 본문의 상황도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나귀가 짐을 싣고, 또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자동차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오늘날의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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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교회 오실 때, 대부분 운전해서 차를 가지고 오셨죠? 

예배 끝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낯선 사람들이 여러분의 자동차의 시동을 걸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지금 뭐하는거냐고, 왜 남의 차를 건드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죠. 

“주가 쓰시겠다.”  이 상황에서 과연 여러분은 순순히 자동차를 내어 드릴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동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자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언가 강제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면, 여러분 마음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기꺼이 주님께 여러분의 것을 드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표현에 대한 의미를 조금 더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계속해서 묵상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가 읽은 성경은 기본적으로 번역된 언어의 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진 헬라어로 이 부분을 살펴보았더니, 한글 성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제가 의문을 느꼈던 ‘쓰시겠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creia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몇 가지 뜻이 있는데, 마가복음에서 사용한 것처럼 ‘쓰다’, ‘사용하다’ 외에도 다른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뜻으로는 ‘필요하다’, ‘부족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NIV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The Lord needs this.” 이것을 한국어로 다시 표현해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이 필요하십니다.”, “주님께서 이것이 꼭 필요하십니다.” 

 

이 세상의 왕이요 통치자인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권위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가는 그 길에, 작은 나귀 한 마리가 필요해서 주인의 허락을 구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나귀주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작은 나귀 한마리를 사용하시려고 나의 허락을 구하시다니... 만일 여러분이 그 나귀의 주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주인처럼 기꺼이 나의 작은 나귀 한마리를 드릴 수 있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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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신앙생활을 하시다보면, 무언가 요구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마음이 꼭 편안하지만은 않은 헌신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흔들리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내 딸 OO야, 사랑하는 내 아들 OO야! 

나에게 너의 작은 것 하나가 정말 필요하단다. 줄 수 있겠니?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너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단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너의 봉사가, 너의 헌신과 섬김이 나에게 간절하게 필요하단다. 나에게 너의 것을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겠니?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하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요청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것을 함께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아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 주인들은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의 나귀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주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꼐서 우리 인생을 사용하시도록 여러분의 심령을 주님께 내어 드리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섬김의 마음을 들게 하신다면, 모른척 마시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일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귀 주인은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의 것을 내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드린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전,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가는 장면은 구약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본문입니다. 

구약성경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아마도 그들은 스가랴서의 예언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에게 와서 나귀를 구할 때에,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나님의 계획이, 예정이 드디어 성취되는구나. 그런데 내가 한 부분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정 가운데 내가 쓰임받게 되었구나 생각을 한다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나귀를 내어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나귀 한마리가 여러분의 것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루고자하시는 그 어떠한 계획가운데, 여러분의 역할이 필요하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기쁜 마음으로 드리지 않겠습니까?



에콰도르의 ‘짐 엘리엇’ 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식인부족인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다시 그 부족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결국 아우카 부족과 함께 살아가며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아우카 부족의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에게 말합니다.

오래 전에 남자 다섯이 우리를 찾아왔다고, 그래서 그들을 죽였는데, 그들이 죽으면서 했던 말이 이와 비슷했다고.. 그 말을 들은 그녀가 말합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내 남편입니다.” 

 

당신들을 위해 왔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 바로 내 가족, 내 남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우카부족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다시 우리를 찾아왔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종려나무가지의  뜻은 “승리(Victory)” 입니다. 다만, 승리를 쟁취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의 방식과 때에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1. 주님은 무엇이 필요하실까?
  2.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시기 원하실까? 
  3. 내가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께 나의 것을 기꺼이 드릴 수 있을까?

여러분의 헌신이 요구되는 순간에 이 질문을 여러분 마음 속에 새겨보시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아마도 무너진 교회를 세우는 일에 부름 받았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로 모든 교회들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제 믿음의 반석 위에 올바로 선 교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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