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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Jake's Blog 2025. 5. 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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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11-20


오늘 제목이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교회들, 그리고 교회를 넘어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이 아마 ‘믿음' 일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우리에게 또 일종의 거리감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세상이
그렇게 너그럽지 못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이나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보면 믿음을 가진 것의 의미를 찾아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전도단(YWAM)의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의 ‘벼랑 끝에 서는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이 일어나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필요한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성경에서 ‘믿음 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 1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이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일어날 것이고, 우리가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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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국에서 오신 손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9년 만에 만났습니다. 딸이 둘 있는데, 큰 애는 대학원에 있고 작은애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작년에 집에서 가족이 다함께 저녁을 먹은 후 둘째 딸은 엄마랑 드라마를 보고 지하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빠는 의사이고 운동하는 딸 옆쪽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동 중에 갑자기 둘째 딸이 사망을 했습니다. 엄마는 위층에 있었고 아빠는 옆에 있었고 심지어 의사였는데, 딸이 쓰러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둘째 딸이 떠났습니다. 부검을 해보니 심장질환이 있었고, 병의 상태보다 훨씬 오래 살아왔던 것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유소년들을 위해 재단을 만들어서 돕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삶에서 다가오는 실망과 절망 앞에 그 어떠한 답을 얻지 못해서 결국은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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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건 작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믿음보다 마주한 상황이 더욱 커서, 그 상황에 압도되어 믿음이 버티지 못한 상황이 생겨나곤 합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그러다 결국엔 믿음을 버리기도 하게 됩니다.



로렌 커닝햄은 믿음을 또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강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해결하실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이 이해가 안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믿음을 버립니다. 그런데 믿음은 이해를 해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우리의 확신인데, 우리가 그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면,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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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0년도에 아프리카로 1년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1주 2주 다녀와보니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년을 다녀온다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프리카를 가기로 결정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꼭 그래야만 하겠어?”, “다시 생각해보면 안될까?”, “기도해보셨어요?, 기도응답 잘못 받으신 것 같아요.”

모두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걱정을 해주시는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막상 용기를 가지고 믿음을 발휘해보려는 그 순간을 가록막는 것은 오히려 저와 가까운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가장 걱정하는 것은 역시 저희 부모님이시겠죠. 저도 마찬가지로 귀한집 자식 아니겠습니까. 특히 저희 어머니,, 가지 말라고도 못하고, 가라고도 못하고 결국엔
“난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겠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나이가 조금 더 들고, 자녀를 낳아보면서 이게 현실적인 믿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계산해서 절대 알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이다. 나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어쩌면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미루는 것, 그것이 솔직한 표현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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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살펴보는 본문은 신약성경의 갈라디아서 입니다.
사도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는 당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쓴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처한 상황은 한국교회와 비슷했습니다. 율법과 행위에 얽매여서 복음의 자유로움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율법주의 이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만 구원을 얻지 못하고, 모세의 모든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음식을 가리는 등,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에 대해서 작성한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입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2장 11절부터 본문의 내용은 사도바울이 게바라고 쓰인, 즉 베드로를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다가, 예루살렘에서 다른 유대인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들킬까봐 서둘러 자리를 떠났습니다.

V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신약시대 초대교회 당시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제자들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개종된 유대인, 그리고 남아있는 유대인 이렇게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는가, 이것을 가지고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이것을 정리한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나섭니다. 이방인에게도 이미 성령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역사가 이미 이방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것을 나누지 못합니다. 이렇게 그가 간증을 합니다. 그래서 이 때를 계기로 더욱 이방선교에 불이 붙게 되면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이 있다고 했던 그 베드로가, 유대인의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총회에서 말했던, 다른 사람도 아닌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던 중에 다른 유대인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식사를 하다 말고 자리를 뜬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도바울이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지 않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자리를 비웠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를 함께 하다가 다른 유대인들에게 발각이 되면, 그것은 유대인들과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까지도 구원하시고, 더이상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유대인들이 온다고 하자 자리를 피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유대인들이 자신을 정죄할까봐, 저들과 교제하지 않은 척,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지 않은 척 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봐 잠깐 눈한번 감고, 믿음이 없는 척 타협을 한 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도 삶 속에서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었는데, 오히려 그는 믿음을 숨겼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봐 잠시 타협한 것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발휘되지는 않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내 삶에서 사용되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19-20절에 바울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말은,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나를 운행하시도록 두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좀 어려운데요,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중요한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나에게 필요한 것,, 더이상 주어가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 싶으신 것, 하나님께 중요한 것 등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입니다.

===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 목회자, 권사님, 집사님 등의 이름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삶의 현장은 이 세상이기 때문에 여러 생각과 고민, 그리고 계획들을 세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만일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우리는 신경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무언가를 잘 하려면 계획을 잘 세워야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 보려고 노력을 해봐야합니다.
사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예외라는게 있고, 아무런 차질 없이 계획대로 진행이 되어도, 가장 최선은 계획한대로 되는 것 뿐입니다. 잘해야 본전인 셈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고,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찾아오는 경험을 한 두번씩 해보신 분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스스로가 세운 계획이 얼마나 작고 알량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은 세우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에도 그 안에 항상 빈 틈을 두려고 노력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역사하실 수 있는 틈을 두어보는 것입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은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거대한 담론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은 너무 셉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지 않기, 고개를 돌리지 않기, 애써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씩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맡겨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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