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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본문

신약성경/요한복음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Jake's Blog 2015. 10. 15. 12:31




[가나의 혼인 잔치]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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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렸을 때 불렀던 찬양 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됐네...." 라는 찬양이 있다. 오늘은 그 배경이 되는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물을 변화시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어서, 사건의 진위여부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나안 혼인잔치 이야기가 "사흘 되는 날에..." 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이것을 기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아마도 제자일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기록의 진위여부에 힘을 실어준다.


2. 이야기의 발단은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것으로 시작된다. 보통 혼인 예식에서는 무엇이든지 풍족한 것이 좋다. 우리 주변에서도 무엇인가 부족했던 결혼식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무엇인가 부족해진다면, 축하하는 분위기와 즐거운 분위기가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창 잔치 중이었던 이 곳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그리고, 이것을 눈치 챈,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상황을 예수님께 알린다. 


3.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왠지 시큰둥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여자여'라는 호칭은 무시가 아닌, 존칭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이 대화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로 보여지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한 여성(그것이 어머니일지라도)의 대화로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권능, 그리고 그것을 통한 놀라운 이적은 혈연을 통해서 일어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다. 


4.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는 무슨 마음인지,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하인들에게 이야기 한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님의 어머니는 잔치를 베푸는 집 하인들에게 순종을 요구했다. 예수님의 가족과 잔치를 베푸는 집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아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하는 말이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가졌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이후에 하인들이 따른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을 크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예수님의 어머니는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명령하실 때, 하인들이 순종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당부했다. 


5. "유대인의 결례에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항아리의 용적을 정확히 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략 80리터에서 120리터 사이로 추정이 된다. 다시 말해, 혼인잔치를 베푸는 집의 항아리 여섯개의 총 용적은 대략 500리터에서 700리터 사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연구해보지 않더라도 당시 상황은 수도시설이 있을리 만무하므로, 이 정도의 용적을 사람의 손으로 물을 길어서 채운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노동임을 의미한다. 


6.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하셨다. 근데 그 명령의 내용이 수상하다. 항아리에 포도를 집어넣어서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한 순간에 발효시켜 포도주를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항아리 안을 물로 채우라는 명령이었다. 아마도 집에서 일을 도맡아 하는 하인들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는 다 떨어진 포도주를 만들었던 것도 아마 하인들이었을 것이며, 그들은 아마도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예수님을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잔치가 무르익었고, 사람들이 취했으므로, 물을 타서 먹여도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혹시 임기웅변을 발휘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7. 하지만 본문을 보면, 하인들은 순종했고, 그 표현으로 "아구까지 채우니..." 라고 말한다. 항아리를 물로 채우는데, 대략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의 아구까지 물이 차 오르도록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순종했다. 우리는 '순종'이라는 단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적당한 수준의 순종은 필요없다. 자신의 지식과 추측으로 순종의 정도를 결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순종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타협된 순종이 아니라, 때론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저 따르는 것, 사실 우리에겐 그러한 순종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는 점점 지식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개인주의 마저도 팽배해져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점점 중요시 여기고 있다. 


8. 사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기본 상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바보로 취급받기 쉽다. 하지만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 순종의 대상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혹시 바보같아 보일지라도,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바보가 될 필요가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을 찾고 계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순종은 오늘 본문에서의 하인들처럼, '아구까지' 채우는 순종이었는지, 아니면 순종을 가장한 '내 상식에 맞춘' 적당한 타협이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마치 이 본문은 하인들을 위한 이야기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혼인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이 포도주의 출처를 모를 정도니 잔치에 그냥 참석했던 손님들도 포도주의 진실에 대해 알았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하인들'이라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약자로 보여지는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오늘 기적을 베푸신 것만 같다.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물을 떠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몸소 체험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에 가담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 '증인'이 된다. 마치 소비자처럼 연회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손님처럼,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예배당 안에 한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예수님의 놀라우심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10.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연회장은 신랑을 칭찬했다. 보통 잔치에서 사람들이 술에 조금씩 취하게 되면 좋은 술과 그렇지 않은 술을 구분하기 어려워지므로, 비교적 품질이 좋지 않은 술을 나중에 내어 놓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이 집의 잔치는 그렇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잔치분위기를 북돋는 뛰어난 품질의 포도주가 나온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포도주를 만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인데! 당연히 포도주는 최고의 품질을 지녔을 것이다. 


11. 그런데.. 과연 신랑은 포도주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만일 몰랐다면, 신랑은 본인의 어깨가 으쓱했을 것이다. 본인이 하인들을 통해서 준비한 포도주가 잘 숙성되고 발효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오랫동안 혼인잔치를 준비해온 수고에 보상을 받는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신랑이 절대 아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우리를 통해 주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겸손해지고, 온전히 우리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놀라운 일은 아마도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12. 하지만 조금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대사가 딱 두번 나온다. 4절과 7-8절이다. 하지만 이 두 대사의 내용은 상반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태도가 변하셨다. 분명히 한명의 손님으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7절부터는 상황을 주도하며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계신다. 4절과 7절 사이에 있는 5절과 6절 중에 6절은 그저 상황을 묘사한다. 그렇다면 남은 5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통해서 하인들은 순종할 준비를 끝마쳤다. 아니, 순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13. 마치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도 같다. 혼인잔치는 예수님과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 결핍'을 경험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위가 '손님'에서 '주인'으로 변하여 명령하는 순간, '부족과 결핍'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분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14. 만일 우리도 예수님을 5절 이전처럼 그저 손님으로만 모시고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도 우리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우리를 계속해서 괴롭히겠지만, 우리가 순종할 준비를 마치고 예수님의 종이 되기로 마음먹는 순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경험해야 할 내용이다. 


15.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만,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인 경우엔 주님께서 그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인들의 손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계속 하인으로 남아있을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식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자존심을 부려야 할 순간은, 적어도 하나님 앞은 아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목적은 바로 '믿게함'이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6.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닌, 체험을 통해 믿는다면 아마도 그러한 믿음은 우리의 변화무쌍한 상황과 상관없이 비교적 덜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험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오늘 예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다.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믿음과 순종'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됐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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