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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반전의 은혜"(창세기 29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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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반전의 은혜"(창세기 29장)

Jake's Blog 2024. 9. 29.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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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29장 16-30절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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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교회에서 창세기 성경통독을 마쳤습니다. 사실 요즘 활자로 된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책은 커녕, 아이들, 성인 할 것 없이 대부분 유튜브 시청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보다보면 글자 책이 지루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처음에 임목사님이 아이들과 다함께 통독을 해본다고 했을 때, 과연 될 것인가라는 고민을 좀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한달 동안 통독을 하는 모습을 봤을 때, 아이들에게, 그리고 각 가정에도 너무나 좋은 시간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마지막 설교입니다. 지난 주에는 이삭의 아래 리브가와의 만남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사실 보통은 성경의 중심인물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보통 이삭에 대해 설교하거나 야곱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들만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통독을 끝낸만큼 저도 좀 욕심을 부려서 우리가 지나쳤을법한 내용으로, 그리고 성경중심인물의 아내를 주제로 지난 주와 이번 주 설교를 구성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결혼에 관한 본문입니다.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은 미래의 장인이 될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 중에 라헬을 더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영어식 발음으로는 레이첼이고, 지난 주 리브가는 레베카입니다. 한글로 번역하며 리브가와 라헬이라고 표기를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레아는 시력이 약하다, 눈에 총기가 없거나 눈이 작은 외모를 표현했고, 라헬은 곱고 아리땁다고 설명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그래서 라헬을 신부로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습니다. 20절 보시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7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약속한 7년이 지나고, 드디어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결혼식과 잔치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라반은 결혼식 당일 저녁에 라헬이 아닌 레아를 신방으로 들여보냅니다. 추측해본건데 사람을 모아 잔치를 할 때까지는 라헬이 신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3절, ‘저녁에’ 라고 말합니다. 어두운 시간에 (당시 전등이 없으므로) 신부를 바꿔치기를 합니다. 그렇게 레아는 갑자기 신부가 되어 야곱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아침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저는 레아는 밤새 한 숨도 못 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침이 다가오면서 점점 날이 밝으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본문은 야곱이 오직 라반에게 따지는 장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만, 좀 더 상상해보면 아침에 눈을 뜨고 아마도 자신의 옆에 라헬 대신 레아가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서 소리지르고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라헬은 어디가고, 왜 당신이 여기에 있습니까!?”

어쩌면 레아는 이 날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원치 않는 결혼으로 인해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비참한 인생을 살았던 한 여성,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레아'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목을 ‘반전의 은혜’라고 지어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전을 좋아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주인공이 위기에 처해있다가도, 반전이 일어나서 다시금 주인공이 승리를 하게되면 괜시리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보면 그러한 반전의 은혜가 숨어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숨겨진, 반전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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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중에 조삼모사 [朝三暮四] 朝 : 아침 조, 三 : 석 삼, 暮 : 저물 모, 四 : 넉 사] 라를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송나라의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원숭이를 많이 기르고 있었는데 먹이가 부족하게 되자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제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화를 내며 아침에 3개를 먹고는 배가 고파 못견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자 그들은 좋아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조삼모사'는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은 실수는 원숭이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역시도 삶에서 충분히 범할 수 있는 실수이며, 믿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두 장의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혹시 누군지 아시나요?


첫번째 사진은 미국의 최고 재벌이었던 '존 록펠러'(1839-1937) 라는 인물니다. 이 사람은 석유재벌로 당시 미국 전체 생산의 1.5%를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현재로 환산하자면 빌 게이츠가 가진 재산의 두 배가 넘는 재벌입니다. 그런데 그는 돈만 많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가장 어두운 때에 오히려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55세가 되었을 때 불치병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마지막 검진을 위해 병원에 갔던 록펠러에게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글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짜릿한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지긋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짧은 한 마디 문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병원 로비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병원비 문제로 환자의 가족과 병원 측이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환자의 가족은 너무 가난해서 병원비를 낼 수 있는 형편이 되질 않았고, 그런 환자를 입원시킬 수 없다는 병원 직원의 목소리가 였던 것입니다. 환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병원 관계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초라한 안색을 하고 있는 소녀가 한쪽에 앉아서 조용히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그 환자의 병원비를 대신 지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물론 누가 지불했는지에 대한 것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습니다. 얼마가 지난 뒤, 록펠러는 병원에 다시 찾아갔을 때 록펠러는 그 소녀의 회복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그는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에 이 순간을 그의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이후 록펠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뜻밖에도 암투병에 시달렸던 건강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98세까지 행복한 삶을 살며 록펠러 재단을 통해 나눔을 페푸는 삶을 살게 되었습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면서 이처럼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미쳐 몰랐습니다. 
내 인생의 55년은 항상 쫓기듯 살았지만, 
나머지 4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였습니다."

그는 시카고 대학을 비롯한 20여개가 넘는 대학교를 세우고, 5천 여개의 교회를 세계 각국에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록펠러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신앙의 모델로 삼는 그런 훌륭한 사람입니다.

 

반면, 두 번째 사진은 '테레사 수녀'(1910-1997) 입니다. 그녀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의 콜카타에 있는 성 마리아 수녀원의 부속 학교에서 소녀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쳤습니다. 이 생활에 테레사 수녀는 잘 적응하여 성실히 학생을 가르쳤고 16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면서 교장으로까지 승진했습니다. 그 사이 1937년 그녀는 로레타 수녀회 안에서 평생을 할 것을 서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평화롭게, 수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며 살아갈 것만 같았던 테레사 수녀의 삶은 1946년 갑자기 바뀌게 됩니다. 그녀는 1946년 콜카타에서 다즐링으로 피정을 가던 기차 안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평안한 로레타 수녀회에 더이상 머물지 않고, 이제는 밖으로 나가 거리에서 고통 받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헌신하여 인도에서 기아와 난민들을 돌보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그녀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시상식에도 평소와 같이 흰색 사리와 늘 신는 샌들 차림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상금을 받으면서 ‘이 돈으로 빵을 몇 개 살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고, 상금을 콜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두 사용했으며, 시상식 만찬을 거부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

 

록펠러와 테레사 수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인생을 모두 존경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둘 중에 하나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머뭇거릴지 모릅니다. 우리 역시도 록펠러와 테레사 두 사람을 보며, 자연스럽게 존경과 경외심이 들지만, 만일 둘 중에 하나와 같이 삶을 살아내라고 한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록펠러가 되고 싶어할 것이고, 테레사수녀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은 너무 힘들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 대단하고 그 삶이 아름답지만, 그 삶을 따르거나 동참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볼만한 부분은 이 둘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엔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이 두 사람의 인생은 어떤 차이를 보일까요? 감히 예상해보건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어쩌면 이 두 사람의 인생이 별반 다를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일지 우리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 현재의 모습 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보시죠.

아마도 오늘 본문의 레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중에 한명일 것입니다. 그리 비중이 있는 인물도 아니고 창세기 이야기의 전개에 큰 영향을 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좀 바꿔보시죠. 비극인가 희극인가가 아닌,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질문해보면 어떨까요?

제 생각에는 오늘 본문의 ‘레아’도 그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그녀의 인생은 조금 다릅니다. 

인사동 북카페, '레아'

사실 제가 레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인사동을 걷다가 눈에 띄는 카페가 있어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의 이름이 바로 ‘레아’였습니다. 제가 당시 신학대학교 재학 중이어서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페로 들어갔고, 커피를 한잔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커피를 건네주시던 여 사장님께 물었습니다.

"카페 이름이 눈에 띄어서 들어왔어요. 카페 이름이 왜 레아인가요? 혹시 제가 알고 있는 레아가 맞을까요?"

그러자 사장님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아마 맞을거에요. 제가 레아처럼 살고 싶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어봤어요”

그 대답을 듣고 저는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레아는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했던 비극적인 인물이 아닌가요?”

그 분은 다시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사랑받았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저는 그 카페 사장님 때문에 처음으로 레아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까 살펴봤듯이 성경에서 드러난 레아의 삶은 실제로 불행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아마도 레아의 인생 중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오늘의 본문을 상상해 보십시오. 첫 날밤이 지나고 밤새 자신의 정체가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며 마음을 졸이고 드디어 아침이 되었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내 아내는 어디있냐며 소리를 지릅니다. 혹시 물건을 집어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그 눈물을 닦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봉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과연 그 결혼생활이 행복했겠습니까? 매일 매일이 행복하지 않고 7년이 가까울 수록 버림받을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어떤 여성이 레아와 같은 삶을 살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사랑하셨고 남편은 라헬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 몇 가지 성경구절을 소개하면서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증거들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 번째 증거 : 자녀를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 29:31)

성경에서는 자녀가 갖는 위치가 매우 큽니다. 대를 잇는다는 것 그 이상으로 자녀는 특히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다는 등의 더 깊은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를 여시고 자녀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 두 번째 증거 : 생애를 마치고 매장지에 장사되는 레아

하나님께서 레아를 선택하셨다는 두 번째 증거는 창세기 49장 29-31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고향에 시신을 묻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봉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제가 죽으면 저의 가족들은 저의 시신을 봉천동에 가서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장례 문화였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2장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땅, 가나안으로 이주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에 매장지를 준비 했습니다. 이 말은 비록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지만, 믿음으로 이곳을 자신의 고향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아브라함은 그리고 그 가족과 후손의 고향은 바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땅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따라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고향을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 그리고 그 아들도 모두 막벨라굴에 장사됩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두 아내중에 막벨라 굴에 장사된 아내는 누구일까요?

야곱이 그 평생에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아니었습니다.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레아는 믿음의 조상들을 이어서 막벨라 굴에 장사가 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사랑하던 아내 라헬은 어떨까요?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창 35:19 )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내, 레아가 그 곳에 묻히고 라헬은 그곳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누구를 선택하신 것일까요? 당연히 레아가 됩니다. 

- 세 번째 증거: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 

이후에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열두 지파의 이름이 되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다가 솔로몬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게 됩니다. 그래서 북쪽은 유다지파를 제외한 11개 지파가 모이게 되고, 남쪽은 유다지파가 남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사실은 지파가 12개면 6개, 6개 혹은 5개 7개 정도로 나뉘는게 일반적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에는 나머지 지파가 모두 모이고 남쪽에는 오직 하나의 지파인 유다지파가 남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주전 722년 강국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이제 온전한 이스라엘 자손은 유다지파 뿐입니다. 이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도 멸망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을 잃지 않게 되고 민족의 정체성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이르러 신약성서의 첫 권인 마태복음을 열면 1장의 소제목을 다음과 같이 달았습니다.

-유다지파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장)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족보는 계속 이어져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신 한분이 오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새 생명을 얻고 그 분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남유다, 다시 말하면 유다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명인 유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아들 유다는 누구의 아들이었을까요? 레아가 낳은 자녀일까요? 아니면 라헬이 낳은 자녀일까요?

창세기 29장 35절을 다함께 찾아보시겠습니까?

"레아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유다는 바로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했던 아내 레아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레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선택하시고 그녀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녀가 살아 생전에는 누린 것은 적을지 모르나 그녀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조삼모사 같은 우리-

송나라의 저공이 기르던 원숭이는 결국 자신이 받게 될 도토리의 수가 같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것만 보고 만족하였습니다. 아침에 적게 받으면 저녁에 많이 받고, 지금 많이 받으면 나중에 적게 받는 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그와 같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받는 것이 적을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인내하며 우리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바로볼 줄 아는 저와 여러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어느덧 목회자로 살아간지 거의 20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가장 힘든 때는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떤 상황 속에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회적으로 봐도 그렇고, 좋지 않은 경기 탓에 많은 분들이 가정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우리는 낙심치 말고, 하나님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 지금 당장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육신의 눈보다 믿음의 눈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이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데 장애물이 될지 모릅니다. 땅의 것들로 살기보다는 하늘의 것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힘들 때면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 때, 서로가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세상의 눈이 아닌,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테레사 수녀의 짧은 시와 함께 마치려고 합니다. 

제목: 하나님의 연필

하나님의 연필, 그것이 바로 나이다. 하나님은 작은 몽당연필로 좋아하는 것을 그리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신다.   

by 마더 테레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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