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현대신학의 시작: 계몽주의 이해하기 본문
<계몽주의의 시작>
성경은 하나님을 이 세상 너머에 계신 초월자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로서 제시하고 있으므로, 각 시대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을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성경의 이중적 진리를 균형있게 표현하기를 추구해왔다. 초월성을 너무 강조하게 되는 경우, 문화와 상황에 대한 관련성을 잃게 되고, 반면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되면 특정 문화에 얽매여버리게 되므로, 초월과 내재의 긴장과 균형을 찾아야 하는 도전에 모든 신학자들은 직면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14년 8월의 총성은 잿더미 속에서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전쟁 이후의 신학적 주제들을 정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동안 유지되었던 신학적 긴장은 빗발치는 총성 속에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한 마디라도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부딪히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내재성보다 초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칼바르트의 표현처럼, 20세기 이전의 신학은 '행복한 학문'으로서의 수백 년 간의 여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의 신학은 1914년에 시작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몽주의 이전 고전주의에서는 이거스틴의 신학이 당대로부터 중세를 거처 종교개혁이 한참 무르익는 그 어간에 이르도록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기준과 패러다임 역할을 했다. 물론 학자들마다 세부적인 부분들은 대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거스틴에게서 물려받은 유사한 세계관을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심으로 인간들의 삶 속에서 은혜를 통해 역사해오셨다고 믿었다. 내재성이 결여되지는 않았지만, 초월성이 조금 더 강조되었던 시기였고, 중세의 고딕 양식의 대성당들은 하나님의 높으심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어서는 중세의 신학자들이 세워놓은 신학적 균형이 본질적으로 깨어져버리게 된다. 새로운 우주론의 등장으로 기존의 세계관이 대체되면서 기존의 내재성보다 초월성을 강조하던 균형이 뒤바뀌어 버리게 된다. 이 두 세기를 일반적으로 계몽주의라고 일컫는데, 이 때는 서양 지성사에 있어서 폭발의 시대이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시발점은 지성자적으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이 그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우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실험의 방법을 강조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위치를 격상시켰고, 인간의 능력을 한층 높게 평가했다. 계몽주의 시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역사의 중심 무대에 두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따지는 식으로 하나님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전 시대에는 신적 계시를 진리의 최종적 결정자로 바라보고, 인간 이성의 역할은 계시를 통하여 주어진 진리를 이해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안셀름의 명언처럼,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는 말이 진리 추구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마치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는 선언으로 바뀐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위치의 격상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중세나 종교개혁기에서처럼 인간들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계로 보지 않게 되었고, 우주를 중심으로 인간들은 그 안의 부품에 지나지 않게 보았다. 즉, 피조 세계의 한 가운데 높은 위치로부터,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지으셔서 세워 주셨던 그 지위를 상실해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계몽주의라는 사상적인 변화도 근거 없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과거 군사적 갈등이 유럽을 황폐화 시켰고, 이 갈등과 신앙적 고백의 대립이 사람들로 하여금 회의론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의 한계 속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철학과 과학의 혁명이었다.
<계몽주의 사상의 기초>
계몽주의는 첫째로, 철학적 혁명의 산물이었다. 이 혁명은 보통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데카르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데카르트의 의도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 발견의 연구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17세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의 탁월성을 통한 방법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수학은 이성 자체의 본질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실수 할 수 있는 경험적 관찰로부터 유래하는 지식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성이 모든 것을 의심할 때, 그 회의의 주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철학의 출발점은 신적 계시가 아닌, 사고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 영향으로 신학 역시 합리주의적 철학에 기초하게되고,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이성이 강조되면서 신의 내재성이 강조되는 길을 터주게 되었다.
둘째로, 과학의 혁명을 통해서 중세의 세계관에서 급진적인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고의 중심을 이룬 것은 우주관의 변화였는데, 이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우주관의 변화는 중세적 관점이 제시했던 바, 천국은 공간적으로 지구 위에 존재하고 지옥은 그 아래에 놓여있다고 하는 우주의 삼층적 주고를 배격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시대의 사고는 수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우주의 양상들만을 현실적인 것으로 취급했으며, 심지어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을 인간의 노력이 드는 모든 지식 분야에 적용했다. 다시 말해, 모든 지식의 분야가 자연 과학의 분파로 취급된 것이다. 과학에서의 이러한 혁명은 아이작 뉴턴의 업적을 통해 그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정리하자면,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과 과학의 혁명은 '미신'보다 '이성'을 더 높은 위치에 두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이성의 시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시대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과 더불어, 자연, 자율, 조화 등의 개념들을 강조했다. 인간의 이성은 단순히 부여받은 속성 이상으로 우주의 근본 질서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보았고, 우주는 자연법칙을 가지고 있는 질서 정연한 체계로 보았다.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자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독립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주 전체가 조화롭게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우주가 질서 정연할 뿐만 아니라, 인식 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에 적합한 방법만 찾으면 진정한 진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치 약속의 땅을 바라 보듯이' 이 시대는 인류의 삶 가운데서 가장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시대였다.
<계몽시대와 종교>
이성의 시대는 문화가 교회와 기독교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던 때였다. 새로운 과학적 사고방식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 면에서도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종료를 자신들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기본 원리들로 환원시키려고 했다. 이제 종교라는 것은 믿을만한 신조만 최소한으로 모아 놓은, 즉 세계 질서의 인과 관계로 보아 입증 가능한 신의 존재라든지, 영혼 불멸, 죄에 대한 사후의 보응과 덕에 대한 축복 정도의 내용들을 모아 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계몽주의는 계시 종교의 필요성을 축소시키거나 배제시키는 한편, 인간이 종교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높게 평가를 내린 시기였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된 신관의 변화 과정은 여기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내재성의 승리는 20세기로 연장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