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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장 설교: 아브람, 가던 길을 멈추고 (창16:1-6) 본문

성경인물/아브라함

창세기 16장 설교: 아브람, 가던 길을 멈추고 (창16:1-6)

Jake's Blog 2020. 10. 13. 23:33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던 공동체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16장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지 10년 쯤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니까 지금은 85세가 되던 때 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위대한 인물의 위인전 혹은 자서전 등을 읽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인물이 어떠한 배경에서 성장했는지, 성장과정 동안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어떤 과정이 겪었는지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위대한 인물 처럼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하면서도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다니고,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기회가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 속에 성경 속의 인물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5장 본문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자녀 없음을 하나님께 말하며,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마도 당시 아브람의 집안을 돌보던 충직한 종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아브람과 사라를 통해서 태어날 사람이 아브람의 후사(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밖으로 데리고 가서 별을 보여주시며,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말해주셨습니다. 본문의 표현을 보면 아브라함도 그것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장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브람은 정 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사래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 결정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되는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때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음에도 정 반대의 행동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자아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보다 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아브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태어날 아이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래의 여종인 하갈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믿음이, 껍데기 믿음에 불과하고,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방식대로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의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째는, 15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벌써 3번째라는 것입니다. 보통 어떤 사람에게 약속을 반복하나요? 약속을 잘 믿는사람에게 약속을 반복합니까? 아니면 약속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약속을 반복합니까? 약속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확인시켜줘야 합니다. 아브람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까지 왔지만, 그 약속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번이나 약속을 반복적으로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여러번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시거나 경험하게 하신 적이 있나요? 우리는 그 이면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전에 중요한 기도를 하던 때가 있었는데, 반복적으로 응답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 화요예배, 식탁 옆 달력 성경구절, 묵상집 본문 등 똑같은 성경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기도 응답을 넘어 확신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람에게 확신을 주고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로 아브람은 15장 8절에서 하나님께 약속의 증거를 요구합니다. 증거 없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암소와 염소, 양, 비둘기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면, 동물을 죽여서 그것을 반으로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대의 약속을 맺는 한 형태입니다.


(예레미야 34:18-20)

18.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19. 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이 약속의 의미는 쪼갠 동물 사이로 걸어 지나가면서,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내가 이 동물처럼 죽어도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서 별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자라, 아브람이 하도 못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답답한 나머지 아브람이 믿을 수 있도록,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왜 이렇게 자녀에 집착했을까요? 도대체 아브람에게 자녀란 어떤 의미를 가졌길래 그는 하나님께 증거까지 요구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고대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고대문화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불임가정은 저주받은 가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아브람의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어떤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한 관계, 자신의 팔자를 고쳐줄 존재 쯤으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의 뜻은 "Ab = 아버지, RAM = 좋은" 입니다. 그가 12장에서 믿음의 여정을 떠난 것은 그의 믿음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민족을 이루게 해 준다는 말에, 사실은 자식 준다는 말에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고향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자녀가 안 생겼습니다. 아브람은 아마도 불만이 점점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만이 폭발 한 것이 바로 본문 16장입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여종을 통해서라도 자녀를 갖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갖겠다는 것이 바로 아브람의 솔직한 내면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은 15장 후반에 일어난 사건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약속의 징표를 요구했을 때, 하나님은 동물들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다 준비했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은 아브람의 자손이 이방나라에서 400년 동안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대만에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7절에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브라함이 그 사이로 지나갔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16장에서 아내 사래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는 의미는, 하나님이 안 해주시면 내 힘으로 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나의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으니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16장 4절에 보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갈이 임신을 하자, 여주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후계자를 낳으니까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의 아내는 아브람에게 화를 냅니다. 믿는 집안 꼴이 엉망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가정인줄 알았는데, 자신의 뜻대로 안되자, 하나님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이 순간 거의 믿음을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6절을 함께 보면, 자신의 여종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아브람에게 화를 냈던 아내, 사래에게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PPT)

 

만일 아브람이  정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면 이럴 수 없습니다. 민족을 이뤄야 하는 자녀를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람의 태도는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입니다. 이제는 그냥 자포자기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좌절하고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먼 곳에서 사람을 불러내어, 오랜 시간 동안 응답을 해주시지 않을까요? 왜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시간을 보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준비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함께 발 맞춰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지난 주에 “믿음은 의존의 대상을 옮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단,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브람과 그 아내 사래는 기다리던 아들을 얻을 수 없자 어떻게 해서든 자녀를 가지려는 조급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대부분 기다림이 부족하여 내린 조급한 결정은 화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조급함이 오해를, 오해가 오판을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그의 섣부른 판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답답해하던 아브람의 아내는 급기야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다”(창16:2) 는 것에까지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후엔 그 생각은 곧 하나님의 뜻처럼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제목과 날 수를 정해놓은 작정기도 역시 다시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동안 내가 나서는 일은 늘 신중해야 합니다. 사라도 답답한 상황을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다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갈 땐 위험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집니다. 하나님께선 사라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지 밖에서 아들을 만들어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앞서가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고, 자신의 뜻대로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은 과연 하나님도 그를 밀어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다룰 내용이지만, 정확히 15년 뒤, 아브람은 아들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람이 낙담한 순간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들이 때로는 삶의 문제 앞에서 실수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다는 사실과, 어쩌면 우리가 낙담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실 수 있다. 열중하고 계실지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람처럼,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만나 낙담하게 될 때, 가던 길을 멈추어 설 때가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릴 때,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6살 정도로 기억하는데, 집에서 어머니께서 물수건으로 열을 식혀주고, 필요한 것을 다 가져다주고, 같이 울고 하셨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병이 낫지 않자 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말이 우선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어릴 때 주사는 무서우니까 안 맞으려고 버티는데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려고 어머니를 찾는데, 어머니가 침묵하시는거에요. 아무 말도 안하시는거에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를 정성스레 간호하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도와주시지 않고 침묵하며, 간호사가 하는 것을 막기는 커녕 그냥 내버려두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구나,, 지나가야 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하며, 순순히 저의 엉덩이를 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사를 맞았죠.

 

하지만 다시 그 일을 돌이켜 볼 때, 주사를 맞던 순간 나와 어머니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제가 도움을 요청할 때, 어머니는 침묵하셨지만, 그 분은 여전히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응답하지 않을 때,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신뢰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다보면, 괴롭지만, 꼭 지나가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고, 하나님도 침묵하시지만, 그래도 지나 보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마저도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 아파하고 계실 것입니다. 고난의 순간까지도 하나님 손에 맡겨드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삶의 여정 가운데 아브람처럼 가던 길을 잠시 멈추게 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것 맡겨 드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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