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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설교: 아브라함, 하나님을 보다 (창22:1-14) 본문

성경인물/아브라함

창세기 22장 설교: 아브라함, 하나님을 보다 (창22:1-14)

Jake's Blog 2020. 10. 14. 02:15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사람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방법을 고집한다고 하면, 절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우리 삶의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비워진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 확신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우리 마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철저하게 순종했던 사람을 꼽자면 아마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가장 잘 나타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더욱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무언가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희생제사로, 즉 죽임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살던 시기의 축복은 다산과 풍요였습니다. 

다시 말해, 농경과 목축을 하는 사회에서 노동력을 의미하는 자녀들을 많이 낳고, 농사하는 곡식과 열매가 잘 수확되고, 기르는 짐승들이 새끼들을 많이 낳는 것이 당시에는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임가정은 저주 받은 사람으로 이해되었던 당시 상황 안에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위협을 무릅쓰고 새로운 땅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힘이 빠져서, 이제는 자녀를 가질 수 없을 것만 같던 때,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때, 새 땅에 도착한지 비로소 25년이 되던 해, 하나님께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허락하십니다. 우리 생각엔 늦었을지 몰라도, 그에겐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는 적절한 때였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이 바로 이삭이고, 이삭은 민족을 이루는 약속의 아들인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 약속의 아들을 이제 와서 바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상황을 겪게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살아가면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과 같은 심정을 종종 느끼게 됩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러한 상황이 찾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라고 나옵니다. 사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삭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살펴보시기 위해서 어려운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 그것이 이삭일 뿐이지 하나님은 애초에 이삭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가끔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상황을 겪게 해주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너무 야박하시다면서 돈 몇 푼으로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돈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려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이실 것입니다.

혹시 현재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내게 왜 이러한 일이 생겼나하고 의문이 드는 일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가 아니라 어떻게...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나는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내용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티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든램지라는 유명 요리사가 나왔는데, 충분하지 않고, 신선도가 그다지 좋지 않은 재료로 요리를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재료를 듣고, 음식 먹기를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고든램지가 요리했다는 말을 마치자, 사람들은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재료여도 고든램지가 만들었으면 분명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 이해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의 생각인가? 누구의 계획인가? 그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본문의 내용, 하나님 명령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인생에 가장 귀한 것,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 것 같습니까? 명령의 내용이 정해졌으면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정해진 명령을 어떠한 태도로 임하는 것인지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그 다음 절부터 나오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얻은 자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일은 누구든지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가온다면 사실 피하고 싶고 미루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우리가 언제 일찍 일어납니까? 예를 들어, 소풍가기 전날 우리는 일찍 일어납니다. 왜? 기대되고 기다려지기 때문이죠. 근데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났다? 제 생각에 아브라함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게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때로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로 우리는 회피를 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언덕을 넘어가기 힘들다고 계속해서 주변만 돌다보면, 결코 언덕을 넘을 수 없습니다. 한번은 어렵더라도 정면으로 부딪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이 어려울 뿐, 한번 넘어가면 괜찮을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가족 중 한명의 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어려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명령에 대한 첫 출발 로 돌아가야합니다. 이삭을 바치라,, 이삭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받은 첫달 사례비를 첫 열매로 모두 헌금을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빠듯하게 살아가는 환경에서 한달치 사례를 전부 드리는 것이 주저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생각을 달리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한달 늦게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기회를 누가 주셨는가 생각해보니, 당연히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결단해야 할 때,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면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곳으로 가기까지 3일이 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 3일의 내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무 일이 없었거나, 둘째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특이사항이 없으면 넘어갑니다. 다시 말하자면 3일 동안 아브라함은 순종에 대해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생각은 바뀌지 않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도착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마 추측해 보건데 종들과 함께 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 불순종의 모든 가능성을 없앤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예정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삭과 함께 산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냐고 물어봅니다. 이삭이 굉장히 똑똑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뜨끔했겠지요?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실거라고 말을 하고 산 위로 마저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아들 이삭을 묶어서 단 위에 놓았습니다. 이제 손으로 칼을 잡고 아들을 죽이고 불을 붙이면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쉽지 않았겠지요, 이삭에게 원래는 네가 태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태어났어. 뭐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아마 이삭도 어쩌면 울고 불고 난리를 쳤겠지요. 아빠 왜 이러세요, 아브라함이 설명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다소 급했는지 두 번 불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1절의 아브라함의 대답과 별 차이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차분해 보이고 오히려 놀란 쪽은 하나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정말 죽일 것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너의 마음을 알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을 죽여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이지만, 가족의 죽음을,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조금 신뢰한 것이 아니라, 더욱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11장 17-19절) 

 

아브라함의 순종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방금 읽은 히브리서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지 않고, 어려운 가운데서 더욱 신뢰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던 때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의심되었던 때가 있으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이러실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원망이 되던 때가 있으십니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무너진 집도 다시 세우시고,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고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순종했던 이 사건을 기념하며,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준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레’라는 단어는 ‘보다’라는 단어가 수동형, 즉 다시 말해서 ‘보다 - 봤다 - 보여진' 으로 변화되면, 똑같이 ‘이레' 라는 단어가 됩니다. 이 되면 이레가 되기도 합니다. 즉, ‘여호와이레’라고 이름 붙여진 땅은 하나님이 보여지신 땅' 이라는 뜻이 되기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신다는 것은 어쩌면, 너희가 사랑할 때 나의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이 아닌가. 바로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순종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을 뛰어넘어 우리가 더욱 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인생의 큰 위기가 닥쳐와도, 많은 사람들이 이제 저 사람은 끝났네, 저 사람 이제 교회 안나오는거 아닌가 몰라 이런 말을 할 때, 보란 듯이 하나님 앞에 더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펴보면 크게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이고, 둘째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바로 순종을 통해서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더욱 신뢰할 때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삶은 결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신뢰와 순종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때로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어려운 순간을 만났을 때,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우리 인생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어려운 때에 더욱 신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삶을 살아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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