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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깊이 알아가기/요나서

요나서 4장 성경공부

Jake's Blog 2015. 7. 23. 12:46




요나서 4장 성경공부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4:1) 니느웨는 회개했고 하나님도 이 도성을 향한 분노를 거두셨다. 하지만 요나의 반응은 심상치 않다. 요나의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는 앞에서 니느웨 사람들의 악한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라."(욘4:2)

 

3. 요나는 하나님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요나의 이러한 반응은 요나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어리둥절한 대목이다. 생각해보면, 요나 입장에서는 최악의 우려가 현실이되었다. 요나 입장에서는 그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펼쳐졌다. 사력을 다해 저지하려 했던 일이 벌어졌다.

 

4.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방인에게까지는 해당되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과 하나님의 행동이 모순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만의 상자 안에 담아 두려 했다. 어쩌면 하나님보다 자신의 신념을 더 믿었을지 모른다.

 

5.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예배한다. 그것이 신이건 물건이던 내가 의지하는 대상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만일 내가 섬기는 대상을 잃으면 절망을 느낀다. 예를 들어,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섬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의미한 인생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다.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존중 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인맥, 외모, 차량, 수입 등을 섬긴다. 이런 것들에 의지해 존재 가치를 인정 받으려 한다.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국 경력이나 업적을 섬기게 된다.

 

6. 우리가 섬기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그것이 없어지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의 대용물을 만들어낸다. 만일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찾아내야 한다. 만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나처럼 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4:4)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되 물으신다. 이 말은 화를 내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상황판단을 정확히 한 것인지 되물어 보는 표현이다. 성난 요나는 '너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은 후 자신이 옳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나는 떠나지 않고, 니느웨를 관찰한다. 

 

8. "요나가 성읍에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업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4:5) 요나는 성읍 안에 위치하지 않았다. 그는 도성 밖으로 나가 혼자 있는 쪽을 선택했다. 왜 일까? 성 안에서 확인하는 것이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임에도 요나가 성읍 바깥에 위치한 것은 혹시라도 니느웨가 자신의 신념대로 무너질 가능성을 염두한 영적 교만함일 것이다.

 

9. 그러던 중에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할 수 있는 박 넝쿨을 발견하여 요나는 기뻐했다. (욘4:6)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욘4:7) 게다가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4:8) 라고 말했다.

 

10. 시로코(Sirocco)라고 불리우는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이다. 시로코가 불면 기운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며, 공기 중의 습기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D.Baly).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불쾌 지수가 높아져서 아무리 온순한 사람이라도 까다로와지고 신경질적이 되어 아무 이유 없이도 서로 싸우며, 온갖 초목은 메말라 버린다. 

 

11.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9) 라고 물으신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앞에서(4절)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보고 성냈을 때, 질문했던 단어와 똑같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자기 입장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로 박 넝쿨이 시들자 이것도 못마땅하게 여긴 점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12. 하지만 요나의 대답은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4:9) 였다. 요나는 하나님께 항복하기보다 지상의 삶을 포기하는 싶어 해 보인다. 그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지 못한다. 그는 현재의 분노와 자신의 이해되지 않음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모두 망각해버렸다. 그는 분노 앞에, 의리도, 신의도, 그리고 믿음도 잊었다.

 

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4:10-11) 요나서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이다. 대답 없는 질문으로 불쑥 끝나버린다. 막은 내린 셈이고, 갑작스러운 엔딩은 이 이야기의 적용을 독자에게로 넘긴다. 

 

14. 성경에서 대부분의 선지서들은 선지자의 메시지에 그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요나서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아니라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춘 유일한 선지서이다. 그러므로, 요나의 모습, 요나의 삶이 곧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메시지는 요나와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15. 학자들에 의하면 요나서의 시기는 기원전 약 760년경,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722년 그리고 그로부터 110년 뒤 앗수르도 무너졌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제외하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하나님을 등져가며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16.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거를 그 분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실적에 두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내 삶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분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도를 정의 내린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이미, 그리고 충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도우셨다.

 

17.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분노는 지나간 은혜를 망각하는 모습과 하나님보다 앞선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요나 같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 아쉬움을 토로하기 전에 우리가 고백해야 할 감사의 제목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혹시 나 혼자만의 하나님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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