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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경배 (마태복음 2:1-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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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경배 (마태복음 2:1-12)

Jake's Blog 2024. 12. 15.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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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경배                               마태복음 2장 1-12절

<도입>

교회력으로는 대림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고, 공동체적으로는 내년을 위한 위원회를 세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의 믿음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우리 모두를 ‘잃어버린 자’라고 바라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 나의 소유였던 어떤 무언가가 실수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현재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은 다릅니다. ‘버린 것’은 다시는 그것을 찾을 생각이나 계획이 없지만,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자’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 입장에서 우리를 잃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우리가 실수로 혹은 어떠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찾으시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혹시 이런 방송 보신 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이 반세기 이상 넘어가니까 이제는 더이상 이산가족 상봉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저도 어린시절 이런 방송을 보곤 했는데요, 참 감동적입니다.

“어렸을 때 어디 살았는지 기억나나?
“몰라요, 집 앞에 개울이 있고, 마당에 큰 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생은 어렸을 때 키우던 개한테 물려서 허벅지에 상처가 있을텐데,,” “맞습니다. 저 어렸을 때 개한테 물린 상처 있습니다.” - “됐다. 찾았다! 내 동생 맞다. 내가 니 언니다. 기다려라”

제 가족도 아닌데,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고 생각하니까 어린 시절 티비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함께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은 그만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오심은 좀 의외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을만한 능력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출생도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포유류 중에 어쩌면 가장 약한 것이 인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나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걷습니다.

돼지는 임신기간이 115일이고, 조그만 쥐는 15일이며, 하마의 경우 8개월입니다.
가장 늦게 태어나는데, 일어나기는 커녕 자신의 목 하나도 가누지 못하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약한 인간의 모습,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장성할 때까지의 기다림이 또 필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비범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다른 방문 손님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진 않았고, 전통적으로는 이들이 동방에서 왔다고해서  동방박사라고 줄여서 부르며, 이들이 가져온 선물이 황금, 유향, 몰약 이기에 세 사람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박사들이라는 표현처럼 복수로 쓰였을 뿐,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방문이 마굿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난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의미를 더해줍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1)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누구인지
2) 왜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는지
3) 그들이 가져온 선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겠다.

<동방박사>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왔다고 본문은 전한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인 '박사'는 그리스어로 magos이다, 이것의 복수형은magi이다. 이 단어에서 'magic' 이란 단어가 파생했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찾아왔는가, 한 별을 보고, 별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다.

하지만,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은 아무나 알 수 있는 별이 아니다. 2절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오자 소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magi는 당시 천문학과 점성술을 공부하던 성직자를 뜻한다.
(하지만 아마도 당시엔 천문학과 점성술의 구분이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
그들은 천문학에 대한 전문가이며, 성경 예언에 대한 전문가였다. 그들은 예언을 따라, 별을 따라 예수께 왔다.
창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민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쪽에서 저 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성경을 보면, 특별히 구약시대에 별을 통해 ‘징조’ 소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도 했다.

그들이 봤던 별은 태양계의 별들이었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메시야의 탄생을 알렸다.

[이미지- 태양계 별들]

태양계의 행성 중에 목성이 제일 크다. 왕별이라고 불린 목성은 고대에서 왕의 운명을 점칠 때, 사용되던 별이다. 그리고 토성은 땅의 왕, 악한 왕을 뜻한다.

그런데 고대 문헌들을 살펴보면 예수 탄생 직전에 목성과 토성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이 메시야를 알리는 사인이다. 이것이 실제로 있었는지 과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직전에 목성과 토성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이 메시야를 알리는 사인이었다. 태양 주위를 돌던 두 별이 일직선이 되어서 하나의 별처럼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착시현상으로 하나의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에는 그것을 보고 별이 춤을 추었다고 이야기 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베들레헴의 별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별이 겹쳤다는 것을 말한다..

지구와 목성과 토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돕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전을 하다가 일직선상에 겹쳐 서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 세개의 별들이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845년마다 한번씩 나타난다.
고대 표현에는 두개 이상의 별이 겹칠 때, 그것이 약간 흔들리며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별이 춤을 춘다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그 현상이 있었던 날, 동방박사들은 태어날 아기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즉,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이러한 천문학적 지식이 있었고, 성경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 곳에서 확신을 가지고 탄생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던 것이다.

<B.C. & A.D.>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자주 BC, 그리고 AD 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B.C 는 Before Christ 이고, A.D는 Ano Domini, 즉 Ano = year, Domini = Our Lord
‘우리 주님의 해’ 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역사를 기원전, 기원후로 구분한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다니엘서, 이사야서에도 예언되었다.  
성경을 연구하던 동방의 박사들은 메시아/구원자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런데 동방박사가 온 것을 두고, 가장 분노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헤롯 왕이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지켜지지 않을까봐, 모든 어린아이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와 헤롯왕의 관계가 구약의 야곱과 에서와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가 야곱과 에서이다. 에서의 후손이 에돔족속이고, 야곱의 후손이 유대인이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헤롯왕은 에돔족속, 곧 에서의 후손이고, 예수님은 야곱의 후손이 된다.
구약에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장자권의 다툼이다. 그리고 예수와 헤롯왕은 왕권 다툼이다.
장자권을 가져간 야곱을 에서가 죽이려고 해서 야곱이 피신했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예수님도 헤롯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했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한다.

즉, 예수님의 오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상징과 예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동방박사들은 구약의 여러 예언들과 또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서 선물을 드리고 경배한다.


그 선물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황금
전통적으로 ‘황금’은 ‘왕’을 만날 때 가져가던 선물이었습니다.

당시 역사가 세네카의 말에 의하면, 당시 중동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황금을 가지지 않고는 왕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즉, 황금을 선물로 준비한다는 것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인도할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2. 유향의 의미 - 제사장
유향은 향기를 발하는 일종의 향수다. 유향을 선물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은 아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오기는 하였지만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향은 가정에서는 온 가정을 향기롭게 하는 데 사용하였고 성전에서는 제사드리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가장 많이 드리는 제사가 소제인데, 소제는 다른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감사드리며 드시는 일종의 감사 제사였기에 모든 제사 후에 거의 소제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소제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유향이 필요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2:1-2)

그러므로, 유향은 제사장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 오셨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역할이다.

3. 몰약의 의미-메시야
몰약은 시스터스(cistus)라고 하는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이다. 아주 비싸고 값진 기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 때 붓는 기름을 관유라고 하는 데 관유를 만들 때에 몰약을 썼다. 값비싼 향을 만들 때 넣는 재료가 바로 몰약이다. 솔로몬 왕의 침상에도 몰약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님의 생애는 몰약으로 시작하여 몰약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몰약을 선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도 바로 몰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랐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한복음 19:39)

아주 귀한 사람의 침상에 뿌리고 정말 귀한 분의 몸에 바르고 하나님이 택하신 존귀한 자
의 머리에 붓는 기름이 바로 몰약입니다. 아기 예수님에게 몰약을 드린 것은 너무나 그 분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라는 뜻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그리고 아주 소중한 분으로 경배하는 마음으로 몰약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탄생할 때,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의 마음을 깨닫고, 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경배해야 한다.
그들은 태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왜 경배했는가?
근본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신뢰했기 때문에, 비록 갓난아기였지만 그들은 경배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가 있다.
외모, 학벌 등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세상 기준으로 사람과 교회를 대한다.

제가 아는 분 중에 30년간 교회학교를 섬긴 분이 계셨습니다. 성실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번번이 장로임직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온지 얼마 안된 분이 갑자기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시험에 들어서 30년간 교회를 섬기던 분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떠난 분은 구두수선실을 운영하셨던 분이고, 오자마자 장로가 된 분은 대기업 SK의 임원이었습니다. 모든 사례가 이런 것은 아니지만, 때론 교회도 사회적 시선으로 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발견을 할 수 없다.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참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성경은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라고 했습니다. 숨겨졌다는 것은 그것이 찾아지고 발견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땅이 어떤 땅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돌밭이던, 잡초가 무성하던, 눈에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2천년 전, 저 멀리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귀한 선물인,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다. 갓난아기로 오신 예수님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역시,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비록 갓난 아기일지라도)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

사람을 어떻게 아는가? 말과 행동을 보면 안다.
어떤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어느 곳에 시간과 노력과 재정을 투자하는지 보면 안다.
예를 들어 말은 모태신앙이라고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소홀히 하거나, 삶 속에서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에 가치를 둔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모태신앙이 아니라, 못된신앙이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세상적 기준이 아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귀한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해서 아기예수께 경배를 드렸다. 우리도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연극 중에 “빈방 있습니까”라는 연극이 있다.
제가 성탄 때가 되면 소개하는 연극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연극 극본이 쓰여졌다.
어느 한 교회의 고등학생들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예수님 탄생에 관한 연극을 하게 되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빈 방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해서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낳게되는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교회에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덕구라는 친구가 있었다. 고등부 교사들은 덕구에게도 배역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대다수가 반대했다. 연극을 망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교사들은 덕구에게 여관주인역을 시켰다. 왜냐하면, 빈 방이 있냐는 물음에 없다고만 대답하면 되기 때문에 실수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연습했고, 드디어 공연날이 되었다.

연습했던대로,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떠났고, 만삭인 마리아와 함께 요셉은 하룻밤을 지낼 방을 찾았다. 이제 드디어 덕구의 차례가 다가왔다. 빈방이 있냐는 물음에 없다고만 하면 된다.

요셉과 마리아가 지친 몸을 이끌고, 여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요셉: “계십니까?” “계십니까?”
덕구: “누구십니까?”
요셉: “혹시 빈방 있습니까?”
덕구: “아… 빈방이 없습니다.”
요셉: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 같습니다. 혹시 빈방이 있으면….”
덕구: “글쎄 우리집에는 빈방이 없….”

그 때, 마리아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대사를 다 하지 못한 덕구에게 선생님들이 옆에서 이야기합니다. “어서 방이 없다고 해!”

덕구: “선생님, 방이 진짜 없지요?”, “우리 집에는 빈방이 없습니다.”
요셉: “아.. 방이 없군요. 알겠습니다. 여보 갑시다.”

그 때 덕구가 대사에 없는 말을 합니다.
덕구: “가지마세요.”
교사: “안돼 덕구야, 방이 없는거야.”
덕구: “아… 빈방이… 아… 지금은 방이 없대요…”
요셉: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무대를 퇴장하려고 하는데)
덕구: “가지마세요!” “우리… 우리집에 빈 방이 있어요. 가지마세요.”

급하게 무대 조명은 꺼졌고, 결국 연극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럴 줄 알았다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덕구는 무대에 남아서 혼자 예수님과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죄송해요. 제가 연극을 망쳐놨어요. 근데 저는 예수님이 내 방에서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이 사건이 극본으로 쓰여져서, ‘빈방있습니까?” 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합니다.
연극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진짜로 이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은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실 빈 방이 있나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노크하며 빈 방이 있냐고 물으실 때, 저는 바빠요,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과제를 해야해요. 회사일로 바빠요. 흥미 없어요 라고 대답하며 빈 방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우리 마음의 방을 내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절,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 기쁜 날에,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더욱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정말 큰 기쁨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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