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송년주일설교(2024.12.29)_"주님의 마음"(눅 10:25-37) 본문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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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어떤 말씀으로 마무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사마리아인 비유의 본문으로 이번 한해 예배를 마무리 해보려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성경 안에 등장하는 여러 비유 이야기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비유 이야기입니다. 또한 도덕과 윤리 분야에서도 많이 인용되어서 불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이 비유는 한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비롯되었고, 이 비유의 핵심 단어는 ‘이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사전적 정의는 '근접한 사람들, 인접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 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쉽게 말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즘엔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은 가족인데, 이웃 곧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곧 가족과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이웃’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대화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
우선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의 궁극적 목적은 ‘영생을 얻는 것’ 곧 '구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구원'이 갖는 위치는 무엇일까요? 이에 관해 베드로전서 1:9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결국, 믿음의 궁극적인 종착지는 곧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의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사실은 질문 부터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기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묻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어떠한 행위로 받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함정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 면죄부 판매 사건이 있었습니다. 면죄부는 말 그대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이고, 그것을 돈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배경은 당시 중세 교회가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건축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축비용이 모자랐습니다. 그러자 면죄부를 구입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논리를 교회가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당사자의 죄 뿐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서 연옥에 가 있는 부모나 형제를 천국으로 끌어 올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뭐라고 했습니까?
Sola fide! =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다시 말해, 구원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는 ‘무엇을 하여야’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교사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맞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라고 대화가 일단락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은 예수님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율법교사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입니다. 이 질문을 보고 한번 생각해보시고 떠올려 보시죠.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아까 사전적 정의에서 ‘이웃’은 인접한, 근접한 거리의 사람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혹시 여러분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고 계신가요? 혹은 최근에 옆집에 놀러가거나, 옆집 사람들을 초대한 적이 있으신가요? 사실 이제는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가 가까운 사람이 우리의 이웃인 셈입니다.
그러면 이제 율법교사의,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시죠.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가진 것을 빼앗기고 폭행까지 당해서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죽게되는 상황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이고, 여리고는 인접한 지역의 마을이었습니다. 거리는 24km 입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는 충분히 걸어다닐만한 거리입니다. 그런데 다음 참고사진을 보시면 이 두 도시 사이의 고도는 1.2km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까 꽤나 가파른 산길인 셈입니다.
게다가 다음 사진을 보시면 당시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길이 어떠했는지 실제 지형을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사진은 실제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가는 길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험준한 산악지형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은 강도들이 많이 출현했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설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출발지가 예루살렘인 것을 감안해볼 때, 그는 유대인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가 강도를 만난 곳은 피할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폭행까지 당해서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죽게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 때 마침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마 그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같이 제사를 드렸을 수도 있고, 어떤 유대인의 행사에 함께 참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외면하고 지나칩니다.
그 다음은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야곱의 셋째 아들인 레위의 직계자손으로 보통 제사장 계급을 제외한 혈통으로서의 레위가문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으로 설명해보자면, 목회자 가정, 장로님 가정, 혹은 3대째 믿는 가정, 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이 레위인도 그냥 지나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종교적인 사람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목회자 가정, 장로님 가정, 혹은 3대째 믿는 가정의 신자가 불우한 이웃을 그냥 지나쳐갔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다고 말해도 이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저도 지나가다가 무거운 리어카를 밀어드리기도 하고, 길을 잃어버린 분들에게 길을 가르쳐드리거나, 일정 장소까지 데려다 주기도 합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일텐데, 그런데 왜 본문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을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자를 지나친 것은 사실 그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면, 거의 반쯤 죽어있는 사람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를 흔들어 깨워보던지, 코 밑에 손을 대어보든지 해야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정결법에 따르면 시체를 가까이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있는겁니다. 그가 살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괜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몸, 곧 시체를 만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험을 하기 보다는 안전한 쪽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율법 때문에 죽어가는 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비슷한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그 일로 유대 지도자들과 분쟁이 생겨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논점 역시, '왜 안식일에 사람의 병은 고치는 일’을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율법을 지키는 일을 우선시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일들을 나름의 이유가 있고,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정도의 경중이 다르고, 더욱 중요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가의 질문, 곧 우선순위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골이라고 볼 수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김으로 그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은 결국 유대인들이 평소에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강도만난 자를 구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일까요?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경멸하던 혼혈민족입니다.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혼혈민족이 되었다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개보다도 못한 존재로 무시했던 민족입니다. 그래서 당시 어떤 유대 랍비의 기도문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들을 향한 저주를 기도문에 포함시킬 정도로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지나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도 북이스라엘의 후손이니 성전재건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갓 포로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예상대로 유대인들은 거절했습니다. 부정한 사람들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같은 민족이었지만 거의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 인이었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그 지역을 통과하는 것도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웃으로 인정할 수 없고, 어떻게 보면 이방인들보다 더 적대감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가고, 마지막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를 지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은 이전의 유대인들과 달리 그 강도 만난 자를 돕습니다. 게다가 두 데나리온을 주고 맡겨서 비용이 더 발생하면 자신이 돌아와서 갚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지금으로는 십만원 정도 보면 되고, 두 데나리온이니까 약 20만원 정도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우리는 이웃을 내 중심에서 항상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이웃은 되어주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인종, 지역, 교육수준, 경제적수준, 취미 등으로 우리는 스스로 이웃을 정하며 살아왔는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가서 우리가 기꺼이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죄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직접 찾아와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향해 나아가고,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길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 사마리아인 실험
오늘 본문을 가지고 심리학자 존 달리(J. Darley)와 대니얼 베이트슨(D. Bateson)은 이 비유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의 근원을 알아보고자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Good Samaritan Experiment)”을 진행했습니다.
달리와 베이트슨은 프린스턴대학교 신학과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집단에는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주제를 놓고 설교를 하라는 과업을 주었고, 다른 집단에는 이와 관계없는 자유로운 설교 과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물에 있는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피험자들은 설교준비를 하고 예배당으로 향했는데, 예배당으로 향하는 길 한쪽에는 강도에게 습격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분장한 연기자로 미리 각본에 쓰인 대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연기자에게 피험자들이 지나가면 기침을 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도움을 요청하라고 시켜놓았습니다. 두 심리학자가 주목한 것은 피험자인 신학생들에게 과제로 준 설교주제와 이들이 쓰러진 사람을 돕는 비율 간의 연관성이었습니다.
두 집단 중 어느 집단의 학생들이 강도당한 듯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많이 도왔을까요?
결론적으로 신학생들이 자신이 준비한 설교 본문과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것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냉정하게 우리의 믿음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신학생들이 강도만난 자들을 도왔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여유있게 예배당으로 출발한 사람들, 곧 시간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돕는 것은 설교 본문이 아니라, 오직 설교 시작 전까지 남은 시간이었을 뿐 피험자들이 받은 설교 주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설교장으로 일찍 출발하여 여유가 있었던 피험자들의 63%가 쓰러진 사람을 도왔으며, 적당한 시간이 남은 사람들은 40%가 도왔습니다. 그러나 설교시간이 임박했거나 늦은 사람들은 10%만이 그 사람을 도왔습니다. 즉 ‘사마리아인의 선함’을 설교하러 가면서도 자기가 바쁠 때는 정작 눈앞에 쓰러져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돕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딘가에 갈 때, 교회에 오실 때도 시간 딱 맞춰 오지 마시고 조금 일찍 여유있게 오시기 바랍니다. 너무 촉박하면 이웃의 요청에,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역사하시는 방식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본 실험을 주관했던 심리학자는 인간성이나 지식, 윤리의식보다는 여유와 넉넉함이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는 ‘넉넉함과 여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넉넉함’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경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마음의 영역입니다.
내가 일면식도 없는 강도만난 사람에게 두 데나리온 곧 이틀동안 일했던 돈을 주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함을 허락하셔서 다시 일해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넉넉함입니다. 내가 밥 먹을 돈을 주어도 괜찮고, 지금 가는 길에서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는 넉넉함, 특별히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넉넉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린이사역을 할 때 교사들과 비슷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기부와 나눔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잘 따르는 아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부와 나눔을 잘 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외모가 더 예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과 고민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은 불공평한가. 왜 예쁜 아이들이 마음까지 착한 것인가 이런 질문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는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예쁜아이들이 더 잘 나누어 먹는 이유는 아마도 추측건데, 자신은 언제든지 또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내것 하나를 주어도 나는 언제든지 어른들로부터 또 받을 수 있다는 여유로움, 그러므로 다시 말해 어린 아이들 마저도 마음의 여유와 넉넉함이 다른 사람을 돕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여 넉넉한 마음과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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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단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만 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은 다시 말해서 이웃은 누가 나와 가까운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의 마음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근접한,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으로 미루어보아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가까이 다가가겠습니까?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이웃을 받아들이면 살 수 있겠지만, 끝내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길가에 버려져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평소 이웃으로 생각하던 유대인은 그냥 지나갔고, 평소 유대인들이 경멸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마음으로 손을 내민 것입니다. 이웃은 나의 학연, 지연, 경제사회적 지위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은 누군가가 다가와서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환대’ 입니다. 나그네와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정신입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올 때,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 친구 중에 아버지 사업 부도로 채권자들에게 끌려가서 손 발이 묶이고 협박을 당하고 온 친구가 악성채무를 먼저 해결하려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항상 저랑 제일 친하다고 말했던 친구인데, 그 순간 제가 머뭇거렸습니다. 20년이 지났는데, 제가 아직도 그게 미안합니다.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은 머뭇거리지 않으셨는데, 정작 우리는 우리 이웃을 위해 작은 도움, 혹은 봉사를 할 때 머뭇거립니다. 그럴때마다 내가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자인가 반성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이웃들을 대해보시기 바랍니다. 다가가셔서 친히 이웃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주님의 만지심을 경험하는 여러분의 일상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 한편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이라는 시입니다.
방문객
by 시인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누군가 방문객이 되어 여러분의 일상에 다가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나의 이웃으로 보내주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시며, 주님의 마음으로 '환대'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을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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