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대림절설교_"기다림"(2024.12.08) 본문
민수기 11장 16-18절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출애굽기 18장 21-27절
21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22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
23 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24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25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26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더라
27 모세가 그의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땅으로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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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Advent)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성탄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한 '기다림'이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시간을 힘들어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말처럼 기다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저의 후배 중에 정말 잘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어떻게 그렇게 잘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말하길, "저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어요!" 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잘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림을 할 수 밖에 없으니 잘 견뎌보기로 결정한 것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도 학업을 지속하면서 서적을 읽다가, 기다림에 관한 흥미로운 글귀를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기다림'에도 적극적인 기다림과 소극적인 기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기다림은 소극적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저 시간이 흐르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저 시간을 보내며 기나 긴 기다림이 끝나길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기다림은 조금 다릅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의미있는 시간들로 채우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의미를 곱씹으며 나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며 배움을 얻고자 하기도 합니다. 조금 쉽게 설명해보자면, 우리 안에 출산을 막 앞둔 산모가 있습니다. 자녀의 출산을 기다리며, 아기의 옷과 신발 등을 구입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그 자녀가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아기가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도 해보고, 이름도 지으면서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열심으로 그 시간을 채웁니다. 바로 이것이 적극적 기다림의 한 예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지만, 저 역시 처음부터 잘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기르다보면, 가끔 혼낼 때가 있습니다. 저희 가정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제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주완아, 너는 이제는 4살 되었으니까 장난감 정리는 이제 알아서 해!”
가끔은 “너는 더이상 3살이 아니야, 4살은 그런거 못해!”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가 자랄 때까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하는데, 부모로서 잘 기다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다림’이란 것은 언제나 내 기준이 아니라 상대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살펴보는 본문은 출애굽기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이후에 광야생활의 이야기들을 담은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종종 이해가지 않는 사건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 하나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리더를 세우게 된 배경을 알려줍니다. 리더의 명칭은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십부장 이었습니다. 당시 배경은 백성들 간에 발생하는 여러 일들에 대해서 모세가 재판관이 되어 판단을 해주는 상황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인원이 많다보니 모세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다들 노예출신이었고 모세만 유일한 왕족출신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결정을 내릴 사람은 모세 밖에 없었다고 모두들 자연스럽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그들이 놓인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바라볼 때, 다시 말해 출애굽기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여정 가운데 인 것을 감안할 때, 과연 이것이 중요한 일인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길일 뿐인데, 그곳에서 멈추어서서 리더를 세우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우리는 오늘 함께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광야길은 얼마 안됩니다.
[스크린에 지도 보여주기]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직선거리로 따져보자면, 실제 거리는 고작 320km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울에서 부산보다 가까운 거리입니다. 자동차로 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서울역에서 호남으로는 광주역, 영남으로는 대구역이 약 300km 정도)
그렇게 볼때 이스라엘 백성도 무턱대고 애굽을 나온 것이 아니라, 단기간 내에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 간에 발생하는 여러 송사들에 대해서 그게 뭐가 중요한가, 우선은 그냥 빨리 광야를 지나가자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광야의 여정은 40년이 걸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이동으로 보면, 320km의 거리는 곧바로 가면 1주일이나 열흘 정도 걸릴 거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약자와 가축이 있는 점을 감안해서 아무리 천천히 갔다 쳐도 한 달 이상 걸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짧은 거리를 40년이나, 그것도 장정만 60만 명, 남녀노소 다 치면 거의 200만이나 되는 인원이 헤매고 다녔다니까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보아도 가나안 땅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20킬로미터니까 이것을 하루에 얼만큼씩 나아갔는지 계산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 평균 22미터를 나아간 셈입니다. 시간 으로 따져보자면 시간 당 1미터도 못 간 셈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요?
물론 여러 사건을 통해, 그 중에서도 불순종의 사건을 통해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살펴보자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자면, 이것은 시간제한이 있는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즉,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던 여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18장입니다. 백성들의 리더를 세우는 부분이고, 그 이후 19장에 어떤 시간이 등장하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시내산이 어떤 곳인가요?
‘십계명 곧 말씀을 받은 곳’ 입니다.
사건 발생의 순서들을 놓고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민수기도 약속의 땅 진입을 앞두고 백성의 숫자를 셉니다. 영어로 민수기를 Numbers 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백성들의 숫자를 세었다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이 약속의 땅 진입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서 정비되는 것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이 여정은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면서, 하나님 백성에 맞는 모습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면,
‘약속의 땅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에도 ‘방식’이라는게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우리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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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부터 대림절이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이 곧 오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라는 표현과 행동에 대해서 초대교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서로의 물건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속히 올 것이라는 종말론적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에 소유물을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이웃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이 비교적 쉬웠을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를 보면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인들은 자신의 삶이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겨났을까요?
초대교회 2세기 이후로 5세기까지를 보면, 기독교의 교리가 형성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들었던 ‘니케아 공의회’ 등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들로하여금 ‘믿음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를 규정(Identify)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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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중세에 이르러는 종교개혁가 중에 한명인 칼빈은 ‘직업이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가장들이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살리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자녀들이 우상이 되면 안되지만, 뒷바라지하고, 도시락 챙기고 옷입혀서 학교를 보내는 일, 가정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 또한 거룩한 사역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보면, 이 모든 것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다양한 방식의 기다림 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돌아보면 의미 없는 기다림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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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18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리더를 세우고, 출애굽기 19장에서 백성들은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즉, 십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시간적 순서를 생각해보면, 백성이 조직되고 정체성이 생겨나면서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공동체를 조직한다, 즉 어떤 지위를 만들고 그 사람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유기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기체 역시 조직을 갖고 있습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처럼 보이는 가족 역시 그 안에 조직이 갖춰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문제는 조직을 가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조직이 교회의 사명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 그 사명을 성취하는 데 적절한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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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마지막 주입니다. 우리가 음력 양력 하듯이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모여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있지만, 다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등등 합의된 의견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은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약속의 땅이 눈앞이니 그냥 빨리 가자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거리여도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시면 못 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삶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을 세우는 일은 광야에 눌러앉자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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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본문을 몇달 전부터 염두해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봅니다. 우리의 여정에서 현재 과정에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우리에게로 적용시키자면, 오십부장 백부장을 뽑는 일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공동체인지를 규정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규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질서를 세워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비를 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연말에 임원을 뽑고, 봄에 세례식도 하고 임직식을 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직분을 받지 않은 분들은 집사님으로 세워지고, 오랫동안 집사님이셨던 분들은 안수집사님으로, 또 권사님으로 세워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방식이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져가는 하나의 방식,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방법이며,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를 이루어가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보통 교회가 개척되면, 보통 건물부터 얻고 간판부터 내 겁니다. 저는 이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새가족이 와서 이 교회가 어디로 갑니까? 비전이 무엇입니까? 등을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할까요?
저는 답을 하는 순간,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공동체는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배에 아무도 타지 않았는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스스로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요?
영어교육도시 근처에 있고, 어린자녀들 비율이 높습니다.
그리고 또 살펴보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미주에서 살다가 오신 분들도 계시고,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중국 등, 우리 안에 문화적 다양성도 존재합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형성된 우리의 모습, 곧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모습으로 모으셨습니다.
이제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도 정체성이 정해지고,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듯이, 우리도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이 정해지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사역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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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신학교 동기 중에 한 친구가, 자신은 청소년과 청년 사역에 헌신하겠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일이죠. 그런데 제가 미국 유학갈 쯤, 그 친구는 젊은 나이에 시골교회 담임으로 가게됩니다. 진도라는 곳인데, 시골이다보니 젊은 사람들은 없고, 약 20명의 할머니 권사님들만 남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과연 그 친구의 사역 방향이 유지되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물론 그 친구가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기도했지만, 결국 그 친구의 사역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매주 예배를 잘 드리는 것, 모든 성도님들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드리는 것, 누구 한 분이 세상을 떠나면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장례예배를 인도하는 것, 그리고 남아계신 분들이 두렵지 않도록 위로하고 천국 소망의 확신 가운데 거하도록 돕는 것이 그 친구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합니다. 이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천국 설교를 그렇게 많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과거에 아이들 사역을 할 때는 아이들을 통해서 천국을 봤는데, 여기서는 할머니 권사님들을 통해 천국을 본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거나 추구하는 방식이 다 다를 뿐입니다.
하루는 동기들 모여서 대화하는데 그중 몇몇은 노인만 있는 교회에 무슨 비전이 있냐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회에 한 두뿐 빼고는 구원의 확신, 천국 갈 확신이 있으면 전체 교인 중에 90퍼센트 이상이 천국 갈 확신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훌륭한 교회입니까?
저는 그 친구에게 너무 훌륭한 교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배 생활을 하고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실천방향이나, 사역적 내용은 공동체가 규정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안에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저번에 주소록을 작성했는데, 저희 예배를 함께 드리는 분들이 55명-60명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약 25명이 아이들입니다. 상당히 높은 비율입니다.
이게 우리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오고싶어하고, 말씀을 외우고 찬양을 부르는 것,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도대체 저 방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이들이 좋아하고 뭔가를 배웁니다.
저희 아이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모든건 듣고서 외우는거죠
맨날 예수 우리의 슈퍼 히어로 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저에게 말합니다. “아빠, 따라해봐.”
예, 수, 우리에, 슈, 퍼, 힐, 럴, 로
과연 저희 아이가 믿음이 뛰어나서 이런 고백을 할까요?
아닙니다. 이 친구는 그저 교회가 좋은겁니다. 자신을 예뻐해주는 어른들과, 교회 형 누나들과 노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제가 거듭 거듭 아이들 예뻐해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저희 아이를 비롯한 우리 자녀들이 지금은 교회가 재미있고 좋아서 올 수 있지만, 나중에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식할 수 있을 나이까지 우리 기성세대들은 그들이 교회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저 그들을 머무르게 할 뿐, 심고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 예뻐해달라고 부탁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말씀드리는데, 오늘은 부모님들께 말씀드립니다. 다른 어른들이 아이들 예뻐해주는 것 감사한 일입니다. 절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어른들께 인사 잘 하도록 교육시켜주시고, 교회 어른분들 공경하도록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예뻐하다보면, 가끔 예의 없이 자라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이 인사하고, 아이들은 인사를 안하는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 우리 삶에 당연한 것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들은 아이들 예뻐해주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서로 존중하고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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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인가요, 신목사님과 대화하며 우리에게 동역자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목사님 만났던 것처럼 어디에 광고하고, 뭐 이런 식은 왠지 싫었습니다.
5월인가요, 임목사님 가정이 제주도에 왔다고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신 목사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 분과 함께 사역하길 원하세요? 이야기 해볼까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동역자가 더 필요하다고 대화했었고, 그 생각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게 저 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만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추석이 막 지나고 임목사님 가정과 식사를 하면서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10월 초 즈음 하루는 저희 가정을 집으로 초대해주시면서 함께 공동체를 세워가는 사역을 같이 해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린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딘 것 같지만, 저는 이것이 길을 돌아가지 않고 바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아직 젊은데 어쩜 그렇게 잘 기다리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잘 기다리는 성격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지금 가장 빠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
이것은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세워져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신앙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고백하신 후에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겠습니다.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나라와 그뜻을 위하여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나라와 그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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