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평화의 왕 예수 본문
성탄절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곤 합니다. 특별히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인데요, 저희 아이가 하나님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합니다. 근데 저희 아이가 글씨를 쓸 줄 모릅니다. 그래서 기특하긴 하지만, 글씨를 모르면서 어떻게 편지를 쓸거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녹음을 하겠다는겁니다. 전화기를 열어서 녹음을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녹음기를 켜줬습니다.
그랬더니 전화기 앞에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뽀로로 컴퓨터 장난감 사주세요”
성탄절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일 외에 공식적으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그리고 성인들도 선물을 주고 받는 날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탄절은 산타의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날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립니다.
산타클로스의 유래는 주교였던 4세기 성 미켈란젤로 성당의 목회자였던 ‘세인트 니콜라스’ Saint Nicholas 가 성탄절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이름이 산타 클로스 Santa Claus 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처럼 내려와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산타클로스와 성탄 선물의 의미는 우리에게 선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데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를 기억하고 이번 성탄주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언급하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장 23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의 뜻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역사 속에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보여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나타내신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고 찬양에서 ‘신실하신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오래전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Good News)이고, 복음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셨고 귀 기울이셨으며, 약속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약속을 지켜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곧 사랑이며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며, 예수의 오심은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막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전하려고 연말에 이웃을 돌아보는 전통을 가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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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쯤 미국 캔자스라는 곳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캔자스의 한 교회는 성탄이 다가옴에 따라서 열심히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교회에 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 시간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교회의 목사님은 예배 후에 그와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붙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만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회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서 너무나도 춥고 배고픈 날들을 보내게 되었고,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헤매다가 그 교회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기차 정거장에서 잠을 자고, 여기저기를 방황하면서 그림을 그려서 하루 먹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정을 들은 목사님은 너무도 딱한 생각이 들어서 “교회 창고가 있으니 그곳을 정리해서 지내고, 교회 청소를 하면서 그림공부를 계속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청년은 이 교회의 창고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창고에는 그 청년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쥐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자다 깨서 쥐를 보자마자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창고에 쥐가 있어요!”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고에 사는 쥐 한 마리까지도 사랑하신다네, 그리고 자네는 더욱 사랑하시지 않겠나? 그러니 언제나 자네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만화를 그리기 바라네.”
청년이 갈 곳은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쥐와 동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친숙해져서 먹을 것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점점 쥐들도 그 청년을 봐도 도망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쥐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게 되었고 쥐에 관한 만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린 만화에서 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누구일까요?
미키마우스 입니다. 그리고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월트 디즈니’ 입니다.
그러므로 월트 디즈니에게 미키 마우스는 그가 비록 창고에서 쥐들과 함께 지내는 신세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던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바로 이 믿음이 ‘임마누엘’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찾아오셔서 ‘임마누엘’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에서 말씀하시듯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예수님의 오심이 누구를 위한 오심이냐, 바로 우리, 나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거라사 광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것과, 그 분이 나와 상관이 있다고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직장에서도 이 사실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연말이라 시상식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 배우들은 수상소감을 말할 때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라고 말하곤 합니다. 배우, 감독의 작품세계에 믿음이 반영되듯 우리의 삶 역시도 우리의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감독들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작품 중에 벤허가 1958년 작품이구요, 1961년도 작품인 King of Kings 왕 중의 왕 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율 브리너 라는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감독은 세실 드밀(Cecil DeMille) 이었습니다.
영화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매다는 장면을 촬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LA에서 노숙자들을 비롯하여 가난하고 피곤한 엑스트라를 모았습니다. 왜냐하면 화난 얼굴들을 카메라에 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촬영 준비가 늦어져서 골고다 언덕의 촬영이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에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수백 명이 각자 맡은 배역대로 분장을 하고 세 개의 십자가 앞에 늘어섰습니다. 이 중요한 장면을 촬영하려던 세실 드밀 감독은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십자가 앞에서 촬영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외치기를 “2분간 묵상을 하고 촬영을 시작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전체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그 순간 감독은 ‘아차 실수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촬영하려는 장면이 화가 나고 소리 지르는 군중의 모습을 찍어야 하므로 조용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이때 마침 어느 구석에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백 명이 합창을 하게 되었습니다.
찬송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다음에는 ‘참 반가운 신도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탄을 축하하는 합창이 울려 퍼질 때, 거칠고 피곤한 그들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성탄에 그들은 비록 촬영장의 세트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라고 생각하면서 각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날 촬영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새로운 힘이 생겨난 사람들처럼 연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중들로 섭외된 엑스트라 배우들도 주연 못지않게 연기들을 잘 하였던 것입니다.
세실 드밀 감독은 ‘그날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은 피곤하고 지친 자에게, 걱정 많고 번뇌하는 자에게 기쁨이 되고, 용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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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우리의 삶을 살아내게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적당히 살아가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우리들을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 안에 머물며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 이라고 부릅니다.
분쟁, 다툼, 미움, 시기, 질투,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장 7절)
그러므로 평화의 왕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장 앞에, 가장 가운데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천군 천사들이 찬양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오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 될 때 이름 하여 부르기를 California Gold Rush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서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빨리, 더 많이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몰려든 광산의 대형 천막, 즉 광부들의 숙소는 너무나 거칠고, 주먹질, 술, 총질 등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소란하기가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와중에 한 Camp에서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산모는 아기를 낳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졸지에 엄마를 잃은 아기가 너무나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 난폭한 광부들이 부모 없는 아이들 기르게 되었습니다.
광부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습니다. 당번을 정하고, 시간표를 짜서 아기를 돌보고, 우유를 먹이고....이렇게 아기를 돌보고 기르는 동안에 이 캠프 안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 술이 적어지고, 고함지르며 싸우는 일이 적어지고, 말소리도 아기가 있을 때에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금 때문에 서로 경쟁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협력을 배우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아기 때문에 지옥이 천국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Roaring Camp(으르렁거리는 집)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이 광부 숙소가 Camp of Luck(행운의 집)이란 이름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집이 된 것입니다.
아기예수가 가진 의미가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칠고, 소란하고, 싸움과 죽음이 난무하면서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예수께서 찾아오시면, 협력을 배우고, 나중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되어 아름다운 사람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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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교사 리처드슨(Don Richardson) 부부가 인도네시아에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갔습니다. 당시 그 지역에는 식인종이 있을 때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부족 간의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족간 전쟁을 멈추고 화해를 하는 방법은 어느 한 쪽이 자기 마을의 간난 아기 하나를 상대편에 갖다 주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면 전쟁이 멈췄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아기를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리처드슨 선교사가 이 섬에 도착한지 2년째 되는 해에 큰 부족 간에 엄청난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싸움은 너무도 치열하여 도무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화해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 쪽 모두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멈출 수도 없는 전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부부가 아기를 안고 이 언덕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 아기를 ‘평화의 아기’로 내 놓겠다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잔뜩 긴장하며 대치하고 있던 양 편 부족들이 놀라움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부부는 누구입니까? 바로 리처드슨 선교사 부부였던 것입니다. 그 부부는 한 살 난 자기 아들을 ‘평화의 아기’로 식인종들 사이에 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감동스런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양쪽 진영의 식인종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의 소리도 아니고, 기쁨의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서로를 죽이다 지쳤던 그 때,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 없는 백인 선교사가 자신의 아이를 내놓겠다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자신을 향해서 서러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로 비로소 전도와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장 10절과 11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께서 나시던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죽음 밖에 없던 이 땅 가운데, 평화의 왕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평화의 왕을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는 성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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