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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성전 세우기" (2024.02.04 주일설교) 본문

주일설교문

"보이지 않는 성전 세우기" (2024.02.04 주일설교)

Jake's Blog 2024. 2. 5. 02:54

에베소서 2장 20-22절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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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학대학교에 재학 시절 '교회성장학' 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즘에는 이 과목이 신학교에서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 '교회'라는 것이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2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나오고 있지만, 시대에 따라 교회의 형태는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지나고, 부의 축적이 일어나고, 또한 도시화 현상이 생겨나면서 역사적으로 보면 소위 대형교회, 메가처치가 생겨나면서 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성장학'이라는 것도 아마도 이런 국면에서 필요에 의해서 탄생한 연구주제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교회의 성장은 교회 건물을 지을 토지를 매입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건물을 더 크게 짓는 것, 그리고 보다 넓은 주차장 부지를 확보하는 것 등이 중요한 개념이자 전략이었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는 도시화현상과 맞물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점점 도시로 몰리게 되었고 소위 메가처치라는 것도 인구밀도가 높아진 도시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었습니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교회도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197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마을의 운동과 베이비붐 현상과 맞물리면서 80년대 이후 교회가 성장했고 90년대들어서는 교회학교 부흥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출산율이 높았던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사람들이 어린시절에는 교회학교가 성장했고, 그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는 청년교회가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속한 세대이기도 한 이 시기에는 교회에서 무엇을 해도 인원을 동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학능력시험 응시자가 재수생을 포함하여 90만명이었던 것에 반해 최근 수능응시자가 44만명인 것을 고려하면 지금의 청년세대 인구는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도시인구가 90퍼센트를 넘겼습니다. 다시 말해 10명 중에 9명은 도시에 거주하고, 오직 1명만이 도시 외곽 지방에 거주한다는 통계입니다. 그래서 목회현장에서도 도시를 공략하라는 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양적 성장에 목말라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시각에서의 교회 성장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기위해 교회 대부분의 자원을 건물에 투자하게 되는 기이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즉, 보이는 성전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희가 함께 나누려는 ‘보이지 않는 성전’ 개념은 2000년대 중반의 서울의 한 중형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고 있을 무렵, 등장했던 표현입니다. 당시 그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건축예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목표했던 200억 예산을 다 모은 후, 어떠한 계기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교회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립니다. 더 큰 교회 건물을 짓지 않고, 탈북민 정착을 위해서 상당부분 예산을 사용하고, 오히려 교회는 규모를 줄여 분립개척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 이후로 한국교회에서도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교회들도 본래 성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의 균형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보이던 혹은 보이지 않던 어찌되었든 '주님의 몸된 성전'을 세우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발버둥 쳐왔다는 사실은 한국의 기독교의 열심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단면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의 균형을 이루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과연 '성전'이 무엇인지 성전의 유래와 의미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무엇인가?

'성전'의 개념을 찾아 성경을 읽어나가다보면 출애굽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출애굽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다음에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을 맺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식을 맺는 내용이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 나오고 바로 이어서 25장부터 성막을 만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1) 성막(성전)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상징합니다.(임재의 상징)

(출 29:45-46)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언약을 맺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상징으로 성막을 건축하게 하신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이후에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성막은 이동형 천막형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천막이기 때문에 거룩한 천막이란 의미로 성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성막에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낮에는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는 불기둥으로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다윗 왕국이 자리 잡은 이후에 이 성막을 고정된 건물 형태로 건축한 것이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이나 성전은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성전)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로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존재만이 아닌 만남을 통한 관계를 맺는 것)

(출 29:42-43)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된 것이 성막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라는 의미로 성막을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회막이라는 히브리어가 ‘오헬 모에드’입니다. ‘오헬’은 장막이란 뜻이고 ‘모에드’는 ‘모임’, ‘만남’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회막은 모임의 장막 또는 만남의 장막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한자 모일 ‘회(會)’자를 써서 회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성막이라고도 나오고, 회막이라고도 나옵니다. 성막이나 회막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의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마지막 세번째로 성전은 죄사함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성막이나 성전은 죄사함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는 곳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죄인이라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대면했다가는 즉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6장 15-17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 제사를 지내는 곳이 성막입니다.

(레16:15, 17)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중략>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씩 온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을 만나주기 위해 주신 것이 성막이고 성전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와서 성막, 성전의 개념이 물리적 공간에서 영적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21절을 보면, 하늘에 있는 참 성전이 무엇인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또 인간의 죄를 사하는 곳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성막의 기능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다 일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육신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곧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이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대속되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성막이시고 참 성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확장된 성전의 개념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교회가 형성되면서 또 발전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승천 후 초대교회 상황에서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기위해 부름받은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를 따라 성전이 되어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에베소서로 오면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께서 모퉁이돌 되셔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특별히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우리들을 가리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20)

다시 말해, 예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전하던 사람들의 믿음 위에 우리가 세움 받아, 그 위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 가운데 우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발로 교회를 찾아 온것 같고,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큰 그림과 계획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예정’ 혹은 ‘섭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르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말하길,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는 건물을 지을 때 어떻게 짓나요? 땅을 파고 철근을 넣고 시멘트를 부어서 건물의 바닥 기초를 단단히 고정시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건물은 아시다시피 돌을 가지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건물을 지을 때,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움직이기 힘든 큰 돌을 코너에 놓고, 그 돌을 중심으로 작은 돌로 양쪽 벽을 쌓아갑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모퉁이(Corner)에 있다고해서 모퉁잇돌이라고 말합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모퉁이 돌이 무엇일까요?

모퉁이에 있는 돌은 이스라엘 건축양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퉁이 돌을 놓는 순간, 집터가 결정이 되는 것이고, 모퉁이돌이 있어야만 벽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모퉁이돌이 되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르심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서 세워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1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에베소서 2장 21절) 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건물을 확장해야 하면 모퉁이돌을 제외한 다른 면의 돌벽을 허물고 연장을 하게 됩니다. 서로와 서로가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연결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세워져가는데,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연결이되어, 함께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개인신앙과 공동체의 신앙 두 부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일종의 운명공동체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두 가지로 봅니다. 첫 번째는 ‘거하실 처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혼자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새롭게 확장된 성전의 의미가 됩니다. 바로 함께 지어져가는 공동체입니다.

제가 예배를 인도하며 기도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 가끔 저희 아내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오늘 설교하면서 ‘함께’라는 단어를 몇 번 말한 줄 알아?” 세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도 제가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고 세워져가는 일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보이는 일에 우리의 신경이 집중되어지고,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중요한 가치로 살아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우리가 어떻게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성전을 이루어가고 있는가의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뉴욕에 있을 때, 한 장로님의 회사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사 한쪽 벽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보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The kind of person you are is far more important than the kind of work you do." 

저는 이 짧은 글을 보면서 참 놀랐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교회에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우선순위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되야 하는가 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우선순위는 존재(being)가 우선이지, 행함(doing)이 우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우리는 존재를 통해 행함이 나와야합니다. 만일 거꾸로 행함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의 변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성전을 함께 세워가는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개인의 마음의 성전, 그리고 함께 연합하여 세워가는 믿음의 성전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보다 더욱 의미있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워가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어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봐야 합니다.

저는 가끔 시를 봅니다. 시의 언어가 가진 함축적인 의미가 좋아서 봅니다. 그 중에 좋아하는 분이 이해인 수녀님입니다. 이 분은 많은 시를 쓰셨습니다. 오늘 그 분의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 이해인 

평범하지만 

가슴엔 별을 지닌 따뜻함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신뢰와 용기로써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월의 보름달만큼만 환하고 

둥근 마음 나날이 새로 지어먹으며 

밝고 맑게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

 

너무 튀지 않는 빛깔로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서는 이웃 

그러면서도 말보다는 

행동이 뜨거운 진실로 앞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랜 기다림과 아픔의 열매인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화해와 용서를 먼저 실천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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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교회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모였을 때 교회가 형성되는 것이고, 우리가 흩어지면 교회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인가는 결국은 어떠한 사람들이 모여있는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을 함께 세워가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처소인 우리 마음과 영혼, 믿음의 가정,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시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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