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숨길 수 없는(2023.10.22) 본문
본문: 마가복음 7장 24-30절
믿음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보여지는가'하는 부분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가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난 한 주간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들었건 말은 무엇인가요?
저 같은 경우는 “무슨 일 있으세요?" 외국 친구들은 저에게 "Are you ok?”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최근에 커피를 한 주 동안 먹지 말아보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식습관으로 물을 잘 마시지 않고, 이른 오전부터 커피로 수분을 섭취하는 습관을 고치려고 시작을 했습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은 첫 날은 너무 피곤하고 졸린데, 두통까지 생겨서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둘째날은 조금 덜 하긴 하지만 여전히 피곤하고 두통이 있었습니다. 삼일째부터 두통도 훨씬 줄어들고 피로감도 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저에게 괜찮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 것이죠. 별일 아니지만 그동안 카페인에 영향을 많이 받다가 끊어보았더니 그 모습이 힘들어보였는지 사람들 눈에 띈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긍정적인 기운을 주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오래전인데요, 함께 생활하던 사람 중에 비밀연애를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얼굴에 써 있는것이죠. 결국엔 당사자 둘만 비밀이고 다른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굳이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 표정과 몸짓에서 그 사람의 마음과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숨기려해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무엇이 우리의 말과 행동, 표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숨기려고해도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는 본문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예수님께서 계시던 지역을 벗어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머물며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했지만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이 숨겨지지 않았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숨기려해도 숨겨지지않는 절대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 분의 절대성이 있습니다. 유일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 절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 삶 속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1800년대에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미국 원주민 지역에서 하나의 고대 석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림을 살펴보니 노아의 홍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너무도 정교하게 내용이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진 적이 없었던 곳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로마서 1장 19절은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선교사가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이미 하나님을 인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숨기고 감추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우심,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능력이며 속성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역에 오셨다는 소문은 결국 신속히 퍼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소문으로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이방 여인이 주님께 찾아 와서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며 찾아오게 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인 남자인 예수께 직접 찾아와서 그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한 일은 그 당시의 규례를 벗어난 다소 도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도,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대화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본문의 설명에 의하면 주님께 나아온 이 여인은 귀신들린 어린 딸을 가진 헬라인(이방인)인 수로보니게인으로 묘사되어 있다(25-26절). 수로보니게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역을 의미하고, 여기서 '헬라인'이란 단순히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헬라의 시민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상류층 여인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귀신에 의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어린 딸을 가진 헬라시민인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곧 주님이 은둔해 있는 집에까지 찾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나아와 엎드리어 딸의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인 남자의 집에 찾아온 행동이나 그 발 아래 엎드린 행동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곧 와서" 라는 표현과 "그 발아래 엎드리어… 간구한다"의 표현으로 보았을 때, 그녀에게서 어떤 마음이 드러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딸을 고치고자 하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드러납니다.
드러난다는 표현은 우리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보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굳이 언급하거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태여 말하거나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뉴욕 대학가에서 청년사역을 할 때, 당시 청년들은 모두 각자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 동창, 이런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친해지기도 쉽지않고, 서로 마음을 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련회를 갔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지를 나누어주었습니다.
Q. 우리 중에 외동으로 보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Q. 형제 자매 중에 첫째일 것 같은 사람은? 막내일 것 같은 사람?
Q. 우리 중에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둘 있습니다. 누구인것 같습니까?
Q. 먹을 것이 두개 생겼을 때 나머지 하나를 주고 싶은 사람은?
Q. 내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누구에게 상의하고 싶은가? 등등
그리고 나서 각자의 답을 발표해보는데 신기하게 대답이 비슷합니다. 유추해보자면 각자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나도 모르게 은연 중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숨기려해도 숨겨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드러나는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집에 찾아온 그녀에게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딸을 고치고자 하는 '간절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간절하다'라는 말은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을 진심으로 원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도 이 간절함에 관해서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우리 신앙생활에서 간절함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우리는 “은혜”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다보니 더 주어지고 덜 주어지는 것의 기준이 없습니다. 다만 이 간절함을 통해 은혜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간절함을 예로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마 요즘 갓 태어난 막내로 인해 신목사님 잠을 잘 못 잘것 같은데요, 갓난 아이가 보통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사이로 수유를 해야합니다. 배고플때 막 우는 것이죠. 울음으로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럼 부모가 자다가 일어나서 먹을 것을 줍니다. 울었더니 부모가 와 준것이죠. 이것이 은혜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의 간절한 기도, 우리의 간절함이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우리가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간절함과 별개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간절한 여인의 간청에 비해 예수님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어쩌면 조금 과한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간청에 비해 너무나도 차가운 거절 처럼 들립니다. 여기 자녀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이 믿음의 여인에게 그와 같은 반응을 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에 언급된 치유기사들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에게 겸손히 찾아와 은혜(치유)를 구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반응을 결코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믿음의 행동을 귀하게 여기셔서 칭찬하시며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중풍병자의 친구들, 손 마른 사람, 혈루증 여인, 회당장 야이로 등).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와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의 정황이나 문맥을 고려하면 비유의 말씀으로 주어진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은 대단히 의도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당시 두로 시돈 지역은 농지제한 때문에 충분한 수확을 하지 못했는데, 유대인들에게 곡식을 사다먹는 부유한 이방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곡식이 부족한 때에 오히려 농사를 짓는 유대인들이 식량이 모자라고, 농사를 짓지 않는 부유한 이방인들은 식량이 있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반응은 이방여인의 믿음과 간절함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방여인의 답변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딸의 온전해짐(떡을 먹음)을 위하여 자신을 개로 여길 정도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낙망치 않고 끈질기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간절함은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내용으로 볼 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의 한 가지 속성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존심 때문에 믿음의 세계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희 이모부님, 축구하러 나갔다가 어깨가 뻐근하다고 병원에 갔는데, 말기 암 환자인 것을 알게 되고, 한 달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말을 못하니까 대답은 안하고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지 못해, 은혜를 거부하고 생명을 얻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본인의 자존심에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살펴야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한 믿음을 품고, 그 믿음이 우리 삶에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봐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는가?
나는 나를 내려놓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가?
일상 속의 나에게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우리는 무엇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제가 매일 어린이집 버스에서 내리는 저희 아이를 데리고 엄마한테 갑니다. 그러면 주완이가 저에게 딜을 요청 합니다.
“오늘 말 잘들었으니까 엄마 오기 전에 편의점 갈까?”
그러면 저는 또 엄마가 싫어할걸 알지만 함께 갑니다. 뭔가 나쁜 일을 할 때의 스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신당부합니다. "이건 엄마한테 비밀이야!" 그리고 아이스크림 혹은 초코우유나 딸기우유를 사줍니다. 완전범죄를 위해 먹고나서 입도 헹구고 쓰레기처리까지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옵니다. 그런데 주완이가 불안해합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엄마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엄마가 한 마디 합니다. “너 뭐 먹었지?!” 그러면 주완이가 이실직고를 합니다.
"사실은 아이스크림 먹었어. 근데 아빠가 비밀이래!!" 저는 또 그렇게 뒤통수를 맞습니다.
가만히보면 아이는 숨길 줄 모릅니다.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자신의 생각 마음 들이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성경에서도 순전한 아이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의 속성입니다. 근데 어른들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주변에 어떤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말고 있었는데 티 하나 안내고 있었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알고 있었어? 근데 어떻게 이렇게 티가 안나?"
우리는 보통 이런 사람들을 보고 사회생활을 잘 한다고 말합니다. 속내를 들키지 않는 것이 어느새 우리 성인들에게 사회생활을 잘 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도 들키질 않습니다.
제 지인 중에 한 분이 직장에서 식사를 하는데 식사기도로 1초 눈을 감았다 떳다고 합니다. 그리고 밥을 먹으려는데 그 찰나의 순간을 누군가 본 것입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야 ㅇㅇ씨 교회다녔어? 그런데 어쩜 그렇게 티가 안나?
그 분이 말하길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데, 계속 그 말이 귀에 맴돌더랍니다. 왜 자신은 조금 더 떳떳하게 반응하지 못했을까. 왜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을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우리가 '숨긴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노년에 작성한 히브리서에서 우리 다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신경쓰지말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하시는 주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어쩌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 여인의 내면에도 바울이 발하는 이러한 겸손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 어서 가 보아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여인이 집에 돌아가 보니 귀신은 떠나가고 딸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29~30절).
그녀는 자신에게서 드러난 간절함으로 은혜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믿는다라는 것은 흑백으로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직분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연수와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정도는 곧 ‘간절함’ 입니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구하는가, 내 마음 속에 얼마나 간절함이 있는가. 간절함이 곧 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 안에 여러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출산을 앞둔 가정, 수험생 자녀를 둔 가정, 건강, 사업의 문제 등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속상한 때는, 교회 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참 속상합니다.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참 속상합니다.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래 전에 가까운 지인 중에 일이 잘 안풀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주 찾아가서 차를 마시고 대화하고 위로하면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것이 저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 전심을 다해서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실텐데, 내가 기도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를 다녀왔을 때, 그 해 여름에 선교사님 아드님이 가족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그 분에 학창시절에 악몽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 갇혀있는 꿈. 아마도 자신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악몽을 오래동안 반복해서 꾸다보니 이제는 꿈 속에서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런데 한 동안 응답이 없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벽을 밀어라’
꿈 속에서 아무리 벽을 밀어도 벽은 밀리지 않았고, 다시 기도해도, 그저 ‘벽을 밀어라’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벽을 밀던 그런 꿈을 오래동안 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벽은 그대로인데 근육이 붙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꿈에서 깨었고, 이제는 상황에 대한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국적은 아프리카이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교회 창고에서 먹고 자면서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LA에 있는 풀러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한국에서 법대를 나와서 미국 로스쿨로 유학을 나왔다가 만나서 결혼을 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소식을 들었는데, 연로해지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귀국했다고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마음 한 켠에 '꼭 다시 들어갔어야 했을까' 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분의 입장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다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그 땅의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다시 그 땅을 밟았고 할 때, 저도 모르게 그 선교사님과 그 가정을 축복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신실하다고 믿는 하나님이, 정말로 신실하게 그와 함께해주시고, 역사해주시기를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다만 숨겨지지 않는 간절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기도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올려드리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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