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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 주일설교_"하나님의 뜻"(행 10:1-20) 본문

주일설교문

2024.03.03 주일설교_"하나님의 뜻"(행 10:1-20)

Jake's Blog 2024. 3. 4. 09:21

오늘은 하나님의 뜻에 관해 이야기 하기 앞서, 먼저 만남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인생은 수 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인생에서 중요하고 소중한 만남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의미있는 만남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들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우리 일상 속의 만남이 얼마나 의미있는 만남인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고, 그 만남 속에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전혀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임에도 교회를 통해 만남을 가지고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서로를 만나게 해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봐야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만남이 어떤 결과를 맺고 있는지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내가 오히려 의미없이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만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진정으로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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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일등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사도로서 훌륭하게 사역하고 있고, 초대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 있던 어느 날 한 의미있는 만남을 가진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평상시에 전혀 만날 일이 없는 한 이방인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베드로에게 그 사람은 전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추구하는 바도 다른 사람입니다. 굳이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관계를 맺으면 불편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 셈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이 만남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사도로서 더욱 지경을 넓혀서 사역을 할 수 있게 되고, 오늘 만남은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에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사도행전 10장에는 가이사랴라는 지역에 고넬료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군대의 계급 높은 지휘관 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2절의 설명을 보면 그는 경건했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유대민족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때 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 28절을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말하길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이거니와…’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제는 곧 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추해보자면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이방인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고넬료가 제 9시 기도시간에 환상을 보게되고,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이게 무슨 일인지 두려워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이야기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다’

다시 말해서, 고넬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길, 욥바라는 지역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청하는 내용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고, 그는 무두장이, 곧 가죽을 다루는 일을 하는 또 다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으며 그의 집은 해변가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래 지도를 보면 가이사랴와 욥바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바는 하나님의 사자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해변가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마음이 바른 사람을 불러서 여호와의 사자에게 들은 내용을 말해주고, 욥바로 보내게 됩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라는 지역으로 거의 도착했을 즈음, 마침 베드로는 그 시간에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갑니다. 그 시간은 6시라고 하는데, 이것은 낮 12시쯤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배가 고팠고, 사람들은 식사를 준비할 그 때쯤,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하늘이 열리면서 한 그릇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그것이 마치 보자기 같이 생겼고, 네 귀를 땅에 드리운 모양, 그리고 그 안에 땅에 있는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성경구절의 설명만으로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조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런 환상을 본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같은 것이 여러 짐승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짐승들입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갑자기 하늘로부터 베드로에게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에게 그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떨까요? 베드로는 강하게 부정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리고 이 환상이 3번 반복된 후

그릇과 짐승들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17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 무슨 뜻인지 의아했다고 말합니다. 즉, 환상의 뜻을 단번에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집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찾습니다. 그 때 지붕 위에 있던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따라서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 수 있었는가

셋째, 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인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허락하셨는가 

먼저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에서 본 짐승들을 절대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레위기 11장에서 나오는 규정, 즉 유대인들에게는 먹어도 되는 짐승들이 있고, 먹지 말아야 하는 짐승들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유대인인 베드로에게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을 먹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그 규정을 따라서 먹어도 되는 짐승과 먹지 말아야 하는 짐승을 구분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서 지켜오던 것, 자신의 신념, 자신이 지켜온 삶의 방향을 무시하고 어기라고 하니, 베드로는 강하게 부정을 한 것입니다. 

이 환상에서 보여지는 짐승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먹지 말아야 할 짐승처럼, 이방인들도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하는,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을 먹으라고 하는 음성으로 보았을 때, 어쩌면 이 말은 유대인인 베드로에게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의 음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이 환상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임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때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지만, 만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베드로의 경우엔,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음성에, 베드로의 강한 부정을 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한 이 말로 인해 과거의 한 사건을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은 사실 베드로가 이미 예전에 예수님께 했던 말입니다. 복음서에보면 예수님이 어느 날 자신이 이 일을 위해 왔노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비밀을 말씀하자 베드로는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절대 안된다고 주님께 강하게 외쳤던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주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라.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황을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과거 자신이 너무도 확신에 차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실수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로 인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확신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들은 두 번째 소리는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

아마도 이것은 적어도 베드로에게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소리처럼 들렸을지 모릅니다. 베드로야 말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사명을 주시면서 사도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 자신의 삶도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셔서 깨끗하게 되었는데, 다른 어떤 것을 베드로가 더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어떻게 베드로가 더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용서받은 경험으로 음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환상이 3번 있었다는 것,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종의 사인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베드로에게 3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일종의 사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3번째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3번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이 질문에 3번 대답하면서 그의 사도성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에게 3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일종의 사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는 환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3이라는 숫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과거 자신의 경험, 특별히 넘어짐과 주님으로인해 다시 일어섰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인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의 만남, 인간적으로 보면 절대 만날 일이 없는 이 둘의 만남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만남을 허락하셨을까요? 사도행전 10장 45-4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서 베드로는 이방인까지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들을 받아주셨는데, 사람인 우리들이 받아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총회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모여서 구원의 범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 베드로가 이 사건을 증언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초대교회와 초기 기독교의 선교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더욱 지경을 확장하여 사도로서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통해 베드로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께서 결정해주시면 좋겠다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정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신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미국에서 청년부 사역을 할 때, 한 소그룹 리더인 자매가 어떤 가방이 너무 사고 싶은겁니다. 근데 하나는 350불이고 다른 하나는 1250불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어떤 가방을 사는 것이 좋을까요, 하나님 말씀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기도에 집중한 나머지 점심시간도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배가 고파서 눈을 떴을 때, 12시 50분이었습니다. 시계에 보인 숫자 1. 2. 5. 0. 그녀는 1250불짜리 가방을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어서 거의 살뻔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행히 구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스갯 소리지만, 사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끼워 맞추려고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과연 이렇게 응답하실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조금 더 쉬운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 쉬운 방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결정을 할 때, 고민도 적고, 리스크도 적고, 심지어 기도도 필요없는 그런 쉬운 방법으로 마음이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나의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 상황 속에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두려움도 적어집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았나요?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 주님을 만났던 순간과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서 그가 예민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세번이라는 숫자는 베드로에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와 좌절이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드로의 삶을 통해 생각해보자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좌절을 무서워하지 말고, 삶 속에서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삶 속에서 다양한 도전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쌓이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도록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연약한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모세를 보낼 때도 그가 혀가 둔하여 말을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말 잘하는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말 잘하는 사람을 붙여 줄테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사명을 해내는 것에도 관심을 두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들어 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 혹은 시행착오들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비록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우리가 다시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하실 것입니다. 신뢰함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났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 나와 결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일부러 가로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 그리고 마주치는 사람들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피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마주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벌써 2014년 1월이 지나고 2월도 지나고 3월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올해에는 많은 일들을 도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의 시행착오를 통해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여러분 되시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가정 되시길, 그리고 그러한 우리 교회 공동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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