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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설교: "하나님의 일" (마태복음 16장 19-28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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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설교: "하나님의 일" (마태복음 16장 19-28절)

Jake's Blog 2024. 3. 17. 23:13

사순절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마지막은 종려주일을 지나 고난주간을 보낸 후, 부활주일로 마무리됩니다. 사순절의 여정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보내보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여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제목은 23절에서 따온 표현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모든 일을 정확히 둘로 나누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리는 종종 이것이 사람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떠한 생각 마저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 내면의 인간적 생각인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라는 마음이 항상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영국의 부흥운동을 이끌었고 감리교회를 탄생시킨 존 웨슬리는 무언가를 판단하는 4가지 기준(Wesley's Quadrilateral)을 소개합니다. 아래 4가지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성서, 전통, 경험, 이성 (Wesley's Quadrilateral)

 

예를 들어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키는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고민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에는 사순절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진 않습니다. 대신 40일이라는 기간이 가진 의미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을 살펴보자면, 기독교의 사순절 절기는 AD 325년에 결정되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1700년간  온 세계가 지켜오는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전통을 유지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에, 그리고 평소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묵상할만한 어떤 은혜의 경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모든 상황들을 종합하여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보면 과연 사순절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가늠해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등의 선지자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질문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 고백에 기뻐 축복을 하십니다. 내가 복이 있다, 네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에게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시간적으로 3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나올만큼 나름 충분했던 훈련의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을 보시면 “이때로부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야할 본질적 사명을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

여기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나온 것은 처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에 베드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항변'이라는 절제된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영어성경으로 보면, 'rebuk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꾸짖다, 책망하다' 등으로 마치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하는 듯한 말투를 연상시킵니다. 게다가 '붙들고' 라는 표현으로 보았을 때, 베드로는 감정적으로 변한 나머지 예수님을 붙들고서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그런 일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조금 전까지는 예수님을 향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정도로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신다는 말에, 그럴 수 없다며, 왜 그러냐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과 따르는 것은 별개'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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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대학시절 선교단체에서 중보기도 훈련을 받을 때, 간사님이 이렇게 기도하게 시켰습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우리는 기도할 때, 이미 우리가 기도할 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이게 맞습니까? 아닙니까? 주님께 마치 Yes or No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분명한 기도제목을 들고 기도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릴 때, 소위 깨끗하고 정직한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아무 것도 들고 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집어넣기 보다는 기다려보고 우리에게 열려지는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길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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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유학을 준비할 때, 사실 유학을 원래부터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언가 새로운 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나가서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처음 드렸던 기도는, 1년 단기선교 이후의 삶을 위한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연초에 나가서 연말이 다 되었을 즈음, 한 교수님께 이메일이 옵니다. 자기 친구이며, 미국에서 입학처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한국에 제가 졸업한 학교에 방문하고 싶어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예상보다 일주일 당겨서 한국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입학처장이 근무했던 학교로 제가 유학을 나가게 됩니다.

우선 학교에 지원하려면 영어점수가 필요했습니다. 유학을 미리 준비했던 친구들은 이미 영어점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저는 2개월 안에 점수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해커스라는 학원 종합반에 등록했다가 일주일만에 환불 받고 독서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데, 시험 유형을 모르니 공부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얇은 단어책 하나 외우고, 시험유형을 파악해보자는 마음으로 시험을 등록합니다. 그런데 이게 신기하면서도 부끄러운 고백인데요, 영어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간에는 쫓기고 해석은 잘 안됩니다. 그런데 객관식 시험은 자꾸 뭐가 답인지가 보입니다. 왠지 이게 꼭 답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해석대로가 아닌 믿음대로 답안지를 작성합니다.일주일 뒤에 편지로 영어점수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유학갈 학교에서 요구하는 딱 그 점수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은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해야 합니다. 당시 인터뷰 떨어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유학 끝나면 다시 돌아온다는 편지와, 그것을 보증하겠다는 교회 목사님, 교수님의 편지 등등 만발의 준비를 해 갑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은 영사에게 비자신청 거절을 당합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립니다. 제 차례가 되어서 영사가 질문합니다. 

미국에 왜 가십니까? / 저는 공부하러 갑니다. / 무엇을 공부하십니까? 전공이 무엇인가요? / 저는 신학대학원 과정으로 입학을 합니다.

영사는 잠시 저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제가 준비해간 서류는 단 하나도 들춰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학교에 원서를 모두 넣고, 합격여부를 기다립니다. 입학처장을 만났으니 당연히 합격이지만, 저에게 중요한 것은 장학금 여부였습니다. 장학금이 많이 나오지 못하면 유학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00퍼센트 장학금이 나오면 가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60%가 나왔습니다. 처음에 저는 못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저보고 믿음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못 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입학처장에게 이메일을 썼습니다. 신경 써줘서 너무 고마운데 사정의 이러저러해서 어렵겠다. 그랬더니 3일 뒤에 장학금을 10% 인상해주겠다고 답이 왔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어서 당시 안집사님과 같은 부서를 섬기고 있었는데, 어찌 되었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장학금이 70%가 되었는데 그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묻습니다.

"공부가 몇년이라고 했죠?" /  "3년이요." / 안집사님은 잠깐 생각하더니  "그럼 제가 3년간 10% 후원할테니 이번에 꼭 가세요." 

제가 한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게 제가 한게 아니라 거의 되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만일 이 상황에서도 제가 안간다고 그러면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부족하지만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유학을 가서도 은혜를 경험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것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일, 혹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은 무슨 기적과 가은 놀랄만한 어떤 일로 인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곰곰히 생각해봄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열려져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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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시면, 베드로도 나름 예수님을 그렇게 만류했던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서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꽤나 극단적 표현이 오갑니다. 그것도 제일 신임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말입니다. 

“예수님! 그건 안 됩니다.” 

가장 측근의 신앙 고백자, 수제자로 여겨 천국 열쇠를 선물로 준 베드로를 타고 들어오는 사탄의 유혹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넌 사탄이야! 물러가라.”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솔직한 그의 내면을 살펴보자면 아마도 베드로 역시 자기 자신도 고난을 따르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갈릴리 바닷가에서 조상이 물려준 낡은 배 한 척, 찢어진 그물을 꼬매면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니까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물이 포도주가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오천명을 먹이며, 죽은 자를 살리는 그 현장에 있었고, 예루살렘의 그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왕이 되라고 소리치는 현장에 제일 가깝게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 받은 신뢰가 가장 큰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면 그 느낌은 뭐냐면 최소한의 보장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되면, 무언가 자신도 괜찮은 역할 하나 정도는 할지 모르는 그런 희망찬 베드로 앞에 지금 예수님이 “이제 그 본 고장인 예루살렘에 가면 내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랬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모든 꿈이 무너지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얘들아,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겠다. 우리 목표가 눈앞에 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권위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 민족이 그토록 소원하는 로마로부터의 국권 회복을 이루어 옛날 우리 조상 다윗,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그 위대한 아브라함 후손의 권위를 되찾겠다. 이 민족적 거사에 너희가 지금까지 동참해 온 것이다. 내가 그 자리를 회복할 때 너희들도 내 곁에 있게 될 것이다. 약속하겠다.” 이러한 말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기대하고 왔는데 주님께서 잡혀서 죽는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그래서 그는 항변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주님께 목소리를 높여서 의사표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오히려 주님께서 베드로를 혼내시며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모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괴로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나더러 십자가 지지 말라고 말리지 말고 너희들도 져라.” 이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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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 십자가를 지셨던 사순절을 맞아, 내 십자가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지고 갈 것인가, 고민해봐야하는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각자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 성격은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십자가 의미는 고난스러운 부분을 포함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겪어야 될 무게를 어떻게 지고 가야 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신약을 대표하는 인물인 사도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만약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라.” 사명감입니다. 자신이 지어야 할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옥에도 갇혔지만,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산 언덕길을 올라가실 때, 길이 너무 힘들어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비아돌로로사 길을 갈 때 베드로 같은 수제자가 나서야 마땅했습니다. “나는 베드로야! 예수님! 비키세요. 이 나쁜 놈들! 우리 예수님을 이렇게 하다니!” 자기가 들어가서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라고 했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이가 젊고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요한이 “예수님! 비키세요. 제가 젊지 않습니까? 제가 지고 갈게요.” 서로 그래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자들이 아니라면,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라도 나타나야 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사람이 이럴 때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눈을 뜨게 해주신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 비키세요. 제가 십자가 지겠습니다.” 중풍병으로 일어나지도 못한 사람이 건강해졌지 않습니까? “예수여! 제가 그 사람입니다. 비키세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먹은 사람이 남자만 5천명이라고 했습니다. 5천 명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서 “예수여! 이게 웬일입니까? 아니,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다니! 비키세요. 제가 지겠습니다.” 이래야 합니다. 열 문둥병자가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제가 열 문둥병자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랬구나.” “비키세요. 제가 지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구레네 시몬도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하게 우리 내면을 바라봐야 합니다. 내가 져야 할, 감당해야 할 믿음의 무게는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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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때가 되면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십자가 행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비아돌로로사 세계 각국에서 이때에 맞추어서 갑니다. 그래서 온 세계인들이 웃통을 벗고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고 그 길을 올라가는 행사를 해마다 합니다. 프랑스령인 코르시카의 한 마을에서는 주님이 지셨던 크기의 십자가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고 비아돌로로사로 올라가는 거리의 길을 험악하게 만들어놓고 항상 행사를 하는데 거기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자원봉사자로 내가 지겠다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지는데 로마 군병들이 실제로 때립니다. 그 피를 흘리며 맨발로 십자가를 지며 그 거리를 올라가는데 피투성이가 되고 반도 못가서 쓰러지고 일어나서 쓰러지고 일어나는데 올해는 이것을 누가 질 것인가 자원봉사 명단을 봤는데 앞으로 40년 행사 자원봉사자가 밀려있다고 합니다. 내가 하겠다며 서로 먼저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믿음의 무게를 지는 것? 체험이 아닌, 진짜 우리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각자 감당해야 할 믿음의 무게를 피하기보다 기쁨으로 감당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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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교회의 한 권사님께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혼자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분이셨습니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셨습니다. 젊은 시절에 사역자와 혼담이 오고 간 적이 있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자기는 아침 잠이 많아서 새벽예배는 못 드려서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게 뭔줄 아냐며, 요즘에 혼자 일을 하면서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새벽예배 못 드릴 것 같아서 사역자 가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했는데, 결국에는 또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하더라. 그러면서 "더 좋은 일로 일찍 일어났으면 삶이 더 기뻤을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쁜 시간을 내어서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이 조금은 늦었을지라도 더욱 귀하게 사용되고 계시길 기도드립니다. 

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 늦게 깨닫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우리는 순종하며 이끄심대로 따라 나아가는 모든 가정, 개인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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