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사순절 설교: 주님을 아는 기쁨 본문
> 본문: 마태복음 16:5-19
우리는 현재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해 가는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그리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기간입니다.
‘믿음’을 정의하는 기준이 여럿이 있겠지만, 아래 그림처럼 아는 것(지), 느끼는 것(정), 그리고 의지를 발휘하는 것(의), 이 세 가지의 교집합을 믿음으로 정의하는 관점도 있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먼저 믿음에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지키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감정적, 정서적인 부분까지도 포함합니다. 만일 이 부분이 빠져있다면 율법주의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원수를 사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의지’입니다. 우리 의지를 발휘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의지를 발휘하는 것 모두가 우리의 균형잡힌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기본적으로 말씀을 아는 것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성경공부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저도 사역을 처음 할 때는 성경공부를 엄청 강조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오랫동안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도 말씀을 안 지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안 지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순종을 중요하게 여기며, 다시 말해 의지를 발휘하는 부분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대다수의 한국교회에서는 ‘정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소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정서가 어때야 하는지,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그리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믿음의 영역에서 정서적인 부분, 그리고 그 중에서도 ‘기쁨’의 마음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아마 나름대로 오랜시간 동안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이 계실텐데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것이 아마 각자 다를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저에게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함 없이 ‘기쁨’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저는 ‘기쁨’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 삶에 예기치 않은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만일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이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버텨내고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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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잘 아는 선배 부부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가족을 통해 많은 후배들이 이 부부처럼 살고 싶다고, 저런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부 사이에 여러번 위기도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순간들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어려웠던 순간들이 여러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해왔던 것입니다.
하루는 제가 그 선배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은 삶의 어려운 순간들을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저는 무언가 심오한 진리의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배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기뻤기 때문에 버티다보니 이기게 된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삶 속의 어려움들을 넘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그 때부터 기쁨이라는 감정을 주의깊게 살펴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 감정들도 종종 느낍니다만, 저는 오늘 특별히 ‘기쁨’이라는 감정에 함께 주목하길 원합니다. 우리 삶을 면밀히 관찰해보면, 우리 각자의 삶을 지배하는 주요한 감정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을 자주 느낀다고 합니다. 타인이나, 여러 상황들이 자신을 해친다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나약한 존재라고 여기게 하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우리의 힘을 빼앗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스스로를 나약하게 여기고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 기쁨이라는 감정은 전혀 다릅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힘을 가져다 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순간, 우리 안에 어떤 새로운 힘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상황보다 의지를 발휘하게 되고, 무언가를 성취하며 다시금 그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기쁨은 우리 삶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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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른 목사님들과 매일 1만보를 걷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녁 늦게라도 잠시 나가서 30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걷고나면 땀이 제법 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계속 걷다가 어제부터는 조금씩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볍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몸의 피로와 기쁨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믿음생활에서의 기쁨을 말할 때, 운동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에 몇몇 가정들과 함께 수영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수영을 잘 못하고 막 배우는 단계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물 속에서 헤엄을 친다는 것은 숨이 차고, 체력적으로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수영을 하고 나서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힘들기 보다는 오히려 작은 성취로 인한 기쁨과 함께 무언가 힘이 솟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수영과 같은 운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여러분도 아마 수영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해내고 성취했을 때, 저와 비슷한 경험, 감정 등을 비슷하게 느끼셨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냈을 때의 기쁨, 그 기쁨은 다시 다른 도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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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청년목회를 할 때, 아마 이맘 때 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절기가 되면 보통 그에 어울리는 행사를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그냥 모여서 특별한 무슨 활동을 하기보다는, 말씀공동체로서 함께 복음서를 읽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중에 가장 짧은 마가복음을 16장까지 통독을 했습니다. 함께 모여, 한 명이 한 장씩 돌아가며 읽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세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피곤함이 있었지만, 통독을 마친 후, 피곤함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이 컸던, 해냄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어떤 청년은 처음으로 집중해서 성경을 읽어본 것 같다며, 다음에는 다른 복음서를 읽어보자고 했습니다. 그 기쁨을 경험한 청년들은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우리 삶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을 누리다보면, 다른 일에서도 기쁨을 누리기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또 다른 기쁨을 맛 보게 됩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힘을 가져다 주는 감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욱 ‘기쁨’이라는 감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어떻게 기쁨을 만들어내고 간직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여러분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도 기쁨이 있으신가요?
기쁨이 있다는 것은 너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 마음 속에 기쁨이라는 감정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이건 솔직히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는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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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구원의 기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때,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너무 떠들면 학생주임이었던 담임선생님은 모든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책상 위로 올라가서 무릎꿇고 손들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장보고 교무실로 오라고 했습니다. 교무실을 다녀온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옵니다. 무슨 일인지 친구들이 묻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웃으며, 선생님이 그냥 집에 가래!! 그러면 와!!!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에서 놓임 받은, 구원 받은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쁜 일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게다가 성경을 보면 우리가 우리 삶을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을 믿으며, 기쁨으로 삶의 걸음을 한발 한발 내 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해야 마땅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혹시라도 삶 속에 기쁨이 부족한 분이 계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만지셔서 기쁨을 꼭 회복할 수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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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쁨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기쁨 중에서도 아는 것의 기쁨에 대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냈을 때 보통 기쁨을 느끼지만, 무언가를 알게 되었을 때도 역시 기쁨을 느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16장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담긴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이야기 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적이 두 번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러분 잘 아시는 오병이어 사건이고, 마태복음 15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건은 떡 일곱개와 생선 두마리로 예수님께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나서 16장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동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자들은 자신들의 양식이 되는 빵을 챙기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항상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님께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 귀족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믿음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그러한 모습, 그들의 올바르지 못한 마음과 태도에 영향을 받으면 안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6절에서 ‘누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누룩은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효모(yeast)입니다. 효모가 많은 빵은 겉으로는 커 보이지만 실제로 속 안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속을 텅텅비게 만드는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의 이해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단어 만을 듣고,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빵을 가져오지 않은 것, 자신들의 양식을 챙겨오지 않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먹을 것이 없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참 답답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오늘 본문이 마침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난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적은 음식으로 수천명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며, 적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분이신데,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신'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소신껏 받아들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만을 신뢰하는 태도는 ‘소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의 적은 자'가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남은 것이 몇 바구니였느냐. 내가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그제서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해서 주님을 바로 아는가? 사실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매일매일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가르침을 들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같은 성경을 보지만, 서로 각자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세례요한, 혹은 엘리야, 예레미야 등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그 시대의 필요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역할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분입니다. 어떤 특정한 필요가 아닌,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이해는 틀렸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때로는 적은 떡과 물고기로 풍족하게 식사를 하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은혜를 받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혜를 받은 것과 주님을 아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는 시선을 제자들에게 옮기시면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누군가 주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정말 잘 알기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주님을 올바르게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바로 알기 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알다’는 단어가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에 기노스코“Γινώσκω”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알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무언가 지식을 습득하거나 정보를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기노스코’는 경험을 통한 앎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험적 앎, 체험적 앎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BTS를 아시나요? 요즘 아주 유명한 한국 남자 가수 그룹입니다. 정말 유명해서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저를 모릅니다. 이러한 관계는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이지, 그를 직접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로, 예수님을 정말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아는 것일지 모릅니다.
유명한 책 중에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어 제목으로는, “Knowing God” 입니다. 이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다르다. (Knowing God vs Knowing about God)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으로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정말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믿게 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결국, 믿음이란 것도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을 더욱 알게 해달라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관계 안에서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점점 알아가며 우리 관계가 가까워질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가며 우리 관계가 가까워질 때,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감정의 변화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서로 잘 모르는 남녀가 만나서 연애를 합니다. 이 말은 서로를 알아보자는 일종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호감’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교제를 하면 할 수록 서로 알아가며 호감에서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더 깊이 알게된만큼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연애를 계속하는데, 계속해서 호감으로만 남아 있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점점 알아가며 깊은 관계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점점 알아가며 진심으로 믿으며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얼마나 기쁘셨으면 베드로에게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의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악한 세력이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내가 천국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잠그면 하늘에서도 잠기고, 네가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열쇠를 주신다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농사를 지을 때, 곳간 열쇠는 자고로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천국열쇠라니요. 그 열쇠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열면 열리고, 잠그면 잠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삶에 문제가 있을 때, 각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를 모아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씁니다. 그리고 때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좌절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바로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르게 알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엇이든지 풀면 풀린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 삶에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상황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옮겨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When your life gets too hard, you need to kneel down to God. 당신의 삶이 너무 정말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라.
살다보면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그럴 때도 있고, 사람이 그럴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제 주변을 돌아보면, 역시 저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제 삶을 방해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의 시간은 물론 에너지들을 빼앗기면서 거대한 스트레스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저는 보통 설교 준비를 하면서 self reflection 을 하게 되는데, 저는 기쁨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실은 제 안에 기쁨이 많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제 삶 속에는 기쁨과 반대되는 감정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을 아는 것.
어떤 삶의 상황 속에서도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저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 곳에 계신 분들 중에, 저와 비슷하게 기쁨이 없어진 상황을 보내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먼저 주님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으로, 또한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우리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기도제목들이 응답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알아가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알아가는데 정말 큰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길 원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주님과 동행하시면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부활을 기다리는 이 사순절 기간이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여러분에게 정말 기쁜 일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여러분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전해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씩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당당하게 다짜고짜 도와달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마지막까지 고민 고민하다가, 그래도 마지막으로 교회에 희망을 걸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의미있게 새기고 있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마치 빵과 같아서 찢기고 나누어질 때 참 교회가 된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한 영향력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넘어져있는 사람들을 일으키고, 그들이 주님을 알아가도록 돕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함께 주님을 알아갈 때,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이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자랑이자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을 아는 것으로 우리 삶에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악한 세력이 틈타지 못하길 기도합니다. 주님을 바로 아는 믿음으로 우리 심령 가운데 거룩한 성전에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의 반석 위에 온전하게 세워져 가길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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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찬양]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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