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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만나가 그친 날”(출 16:1-4, 수 5: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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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만나가 그친 날”(출 16:1-4, 수 5:12)

Jake's Blog 2024. 10. 28.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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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통독을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예배 설교 본문도 출애굽기를 선택해서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도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통독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반찬 투정을 하지 않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가 밥을 안먹고 머뭇거리니까 어머니께서 왜 밥을 안먹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먹을게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어머니 손이 제 앞으로 오시더니 밥그릇을 휙 치워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끼니는 굶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밥 투정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즘을 보면, 과거에 비해 분명 먹을 것이 더 풍성해졌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전에 비해 감사가 줄어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언가를 누린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보릿고개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제는 먹을 것이 넘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통계를 보면 국내에서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가 2만톤이 넘고, 이것을 각 가정으로 환산하면 약 1kg 의 음식쓰레기를 매일마다 버리고 있다고 합니다.
1kg이면 고깃집에 가서 5인분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굶주렸던 시대와 풍요로운 시대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태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대로이신데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우리가 변한 것입니다.

오늘은 만나에 대해서 나눕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 없이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풍성한 시대에서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배고프던 시절에 비해 필요한 것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어떤 선물을 받아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면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생깁니다.

군입대 전 고등부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입대 전 마지막 주일, 학생들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더니 아이들 환호를 지릅니다. 주일 저녁, 지하철역 앞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미스터 피자 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아이들 표정에 실망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베니건스 정도는 갈 줄 알았어요”
제가 사비로 식사를 대접하면서도 무언가 불편했던 식사였습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 받는 다는 것은 분명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느끼지 못한 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그것을 깨닫고 감사함 줄 아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배경은 광야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풍족과는 거리가 먼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쓴 물이 나왔던 마라를 지나 엘림으로 도착하여 풍성히 물을 먹을 수 있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살펴보는 본문은 여러분 잘 아시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요, 먹을 것이 없어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심으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뒤에 미디안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 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홍해에 도착해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건넌 다음 중무장한 채 뒤따라오던 바로의 기마병들이 물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꽤 많은 본문을 할애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만큼 당시 사건이 강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분으로만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매일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아니고, 매일 악이 괴멸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신바람이 나는 일이라도 지나가면 곧 시들해집니다. 결국 남는 것은 일상의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의 흥분이 가라앉자 일상적인 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식수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전까지 살던 이집트에서의 삶과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지만,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따라서 이집트를 나와 광야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먹고사는 게 막막했습니다. 차라리 다시 노예가 되어 음식이라도 잘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출 16: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 말을 들은 모세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답답했을 겁니다. 광야를 횡단하려면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현실이 어렵다 하더라도 광야만 건너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세가 어떻게 뚫고 나가야만 했을까요?

이 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4절인데요,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들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항상 기도했으니, 어쩌면 자신의 노력도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다릅니다. 모세가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셨습니다.

값없이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하여 그들의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것이 은혜의 양면성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인지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서 음식 이야기도 드렸지만, 풍족한 시대에 살아가는 것이 감사한 일인데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은혜와 감사를 잊게 됩니다. 우리에게 현재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처음 얻었을 때의 마음을 떠올려보십시오.

은혜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떤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감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함께 살펴보는 만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어디서부터왔는지 그 출처를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아침에 이슬이 마른 뒤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깔렸습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묻기를 ‘이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만나’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만나(מָן, manna)는 원래 가나안 지역의 사투리인 ‘만’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 뜻은 ‘무엇’(what)입니다. 무엇이라는 단어가 만나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는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주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은혜는 때론 정의되지 않습니다.
다만 은혜의 주체를 아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나올 때 빈 몸으로 왔던 우리가 지금은 꽤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희 안에 이제 출산을 카운트다운 해야하는 임산부 두 분이 있습니다. 새 생명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 창조의 신비입니다.

저희 가정의 경우엔 출산이 좀 늦었습니다. 초산에 노산이라 추가 검사를 더 해야헸습니다. 건강한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히 여겼는데, 막상 당사자가 되고 노산이다보니 과연 건강한 아이가 태어날까 노심초사 했습니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 것, ‘은혜’ 입니다.

제가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었는데요
저희가 미국에서 바쁘게 살아서, 저희 아이는 태어난지 6주만에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회 권사님이 원장님이셔서 정말 정성껏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 어린이집에 발달장애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저희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마주쳤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아이가 돌이되어도 걷지를 못하고, 말을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말을 하지 않으니까 저희 아내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저희아이를 검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발달장애 같은 경우엔 신생아 때는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관찰하고 검사를 해야합니다.

하루는 집에 왔는데 아내가 우는겁니다. 우리 주완이 말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괜찮아, 괜찮아 그럴 일 없다. 혹시라도 말 못해도 우리 애야. 괜찮아.
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의 건강이 당연한 것이 아니구나를 깨달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셔서 아시지만 저희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말도 잘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문용어로 오디오가 끊기질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저희 아이가 하도 떠들면, 저희가  “말 좀 그만해!, 노래하지마!” 라고 말합니다.
말 못할까봐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아이가 말을 잘해도 그것이 감사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이것이 은혜를 망각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를 사모한다. 은혜를 구한다는 표현을 종종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은혜가 마른 것이 아니라, 은혜임을 깨달았던 우리 기억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삶을 잘 돌아보십시오. 어쩌면 지금 조금은 거칠고 험한 길을 걷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실 때, 어려움도 분명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내일도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이 만나가 그친 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했던 만나가 어느 날 갑자기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꽤나 당황스러웠을겁니다. 막막했을겁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끼니를 때워야할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을 멈추었을까요?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 5:12)

멈춘 시기가 중요합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직후입니다. 다시 말해, 경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기 전까지 그들을 돌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나가 그친 날은 하나님의 은혜가 멈춘 날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양식을 책임질 수 있게 된 날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껏 받아왔던 은혜의 방식이 달라진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살다보면 만나가 그친 것처럼, 우리에게 은혜가 멈춰버린 것 같은 날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직업 혹은 직장, 건강,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간 먹던 만나가 그친 것은 나름 굉장히 큰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냉정하게 보면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을 나온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 이제는 땀을 흘려야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는 처음 상태로 돌아온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축복이 회복된 날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축복이 무엇일까요?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지음으로 '생산성의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다시 축복의 상태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나가 그친 것은 그들이 비로소 자신의 양식을 감당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곳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0:13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변화로 이끄신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라는 은혜가 그쳤지만, 그들은 농사를 시작할 수 있고, 땅의 소산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은혜가 찾아왔습니다. 다만, 새로운 은혜의 방식이 낯설거나, 아직까지는 그것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오광수 시인의 ‘내게 모든 것이 은혜' 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아픔을 몰랐다면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새날이 기다려지고
아침과 함께 찾아온 햇살이 저리도 고운 것을
내가 알기나 했을까?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반갑고
함께할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한데
더하여 또 다른 하루를 선물로 받음이
내겐 큰 은혜인 것을,

아이야!
하얀 보자기를 준비해두렴
보라색 실로 나의 이니셜도 수놓고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내의 미소랑
처음 두근거렸던 내 심장의 수줍음을 담아
빨간 끈 가지고 열십자로 묶어서
고이 보관해두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사랑 때문에 참으로 아름답고
믿음이 있기에 진리를 깨닫고
소망이 있기에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음을,
아!
아름다운 세상
서로 도와 가며 살면 더 좋은 세상
그곳에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내겐 큰 은혜인 것을,
(오광수·시인,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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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매일이 은혜입니다.
그것이 만나와 같이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이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은혜가 멈춘 것 같을 때, 또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은혜가 찾아오곤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를 주셨던 이유와 그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3, 16)

혹시 어려운 길을 걷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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