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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결심(決心)" 창세기 7장 1-12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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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결심(決心)" 창세기 7장 1-12절

Jake's Blog 2024. 9. 9.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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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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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린 시절, 라디오라는 문화에 처음 발을 내딛은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인기있던 라디오방송은 ‘별이 빛나는 밤에’ 였습니다. 

 

어린나이에 느낀 라디오의 매력은 소리에 집중하며 상상하는 것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들려지는 소리에 집중하다보면 그 장면이 머리속에 상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라디오 음질이 좋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안테나를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보고, 창문 옆에 라디오를 가져다두기도 했습니다. 목적은 단순했습니다. 그저 더 잘 듣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기도하며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는 것이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잘 들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 필사적으로 안테나 각도를 이리저리 바꾸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은 요즘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창세기 본문으로 설교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노아가 저는 아마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 상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믿겨지지 않는 말, 그리고 그런 날이 언제 오는지 알 수도 없을 때, 노아만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순종했습니다. 

 

1.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 (1~5절)

 

1)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견에 따르면, 70-80년 동안 방주를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100년 가까이 정말 긴 시간 동안 그는 방주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때로는 결정하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결정하고 결심한대로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방주를 짓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어제 신목사님과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인 어도초등학교와 그 주변을 방문했습니다. 교회와 가장 가까운 동네여서, 이전에 물건을 사러 잠시 가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직접 걸으면서 동네가 어떤지 살펴보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한참 걷다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편의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더니 조금 지나니까 비가 쏟아지는겁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둘 모두 편의점에서 우산을 구입했습니다. 

 

맑은 날에 우산을 구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가 오니까 우산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이치에 맞습니다. 상황적으로 타당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맑은 날 그것도 산 위에서 방주를 100년 가까지 계속해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강한 소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방주는 일반적인 배의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조종간과 키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디론가 가기 위해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떠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내가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의존해서 도착하는 곳에서 다시 정착 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때로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결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믿는게 신기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면 역사가 단군에서 시작됩니다. 단군신화라고 합니다. 단군의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을 지나서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을 실존인물로 믿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전문가들의 연구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전에 저희 아이가 엄마랑 뽀로로파크를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저녁에 제가 물어봅니다. “주완아 오늘 어디 다녀왔어?” 그랬더니 저희 아이가 말하길, 뽀로로를 만났다는겁니다. 

그래? 라고 말했더니, “아니.. 아빠. 진짜 뽀로로를 만났어.” 그래서 “그래 알았어.”

“아니. 진짜 뽀로로라니까. 티비에 나오는 뽀로로 있지? 오늘 진짜 만났다고!”

저희 아이는 현재 뽀로로가 실존한다고 믿고, 제주도에 산다고 믿습니다. 

 

물론 어르신들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태왕사신기”에서 만났고, 왕건은 “태조 왕건”에서 만났고, 이순신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우스갯소리이지만, 사실 우리가 그들을 만났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닙니다. 사료가 있고 또 전문가들의 연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이 사람들이 옛날에 실존했던 것이 확실하다고 내가 믿기로 결정을 해서 믿는 겁니다. 모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내가 믿기로 결심해서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창세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연결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지나서 자신들에게까지 옵니다. 그들도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심입니다. 곧 우리 마음으로 정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이 말은 보통 사람이 들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천 년 전에 팔레스틴 지역에서 살다가 처형당한 예수라는 인물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약속해줍니다.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는 구원자였다는 것, 이미 구약에서 1500년에 걸쳐 예언이 되었고 그것을 이룬 분이 예수라고 성경이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성경에서 약속해주는 말씀을 믿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지구가 둥그렇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직접 지구 밖에 나가서 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은 전문가들, 천문학자들이나 우주인들이 사진도 찍어오고 해서 그것을 보며 믿기로 결정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자료를 제시해주어도 조작이라고 하며 믿지 않습니다.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반대로 ‘사실을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게 하나님은 그와 온 가족이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심판의 때에 방주에 들어가야 살 수 있다는 것, 어딘가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훗날의 상징입니다. 심판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가 살길을 얻은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 말은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 밖에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정말 의롭습니까? 나중에 홍수가 끝나고 그가 가장 처음 한 일을 보면, 포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해서 옷을 벗고 잠이 듭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의로운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방주를 통한 구원은 노아의 선함으로 인해 주어진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노아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위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감사함이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노아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마음으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 곧 마음을 정하는 것이 때로 중요합니다.

 

2) 예배로 살아가는 삶 

 

그 다음 구절을 보시면,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여기에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남기게 하셨습니다. 짐승들을 짝을 지어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종의 보존을 위한 것이지만,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을 데려오게 하십니다. 이것은 제사, 곧 예배를 위한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믿음의 결단을 유지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노아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완벽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실수하고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은 그곳이 어디이더라도 거룩한 자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리, 삶의 현장을 은혜롭게 바꾸고 싶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그곳이 은혜의 자리로 바뀔 것입니다. 

 

방주 안에서도 노아와 가족들이 드리는 예배로 인하여 방주는 곧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1년 동안의 방주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 안에서 노아와 가족들 8명이 배에 타고 있는데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창문은 저 꼭대기에 작은 것 하나만 있어서 밖이 보이지도 않고, 오직 소리만 들립니다. 무슨 소리가 들릴까요? 우르릉 쿵쾅 하면서 소리는 엄청나고, 배는 심하게 흔들립니다. 또 밤에는 캄캄하여 더욱 두렵게 느껴질텐데 그 안에서 그들은 예배를 드립니다.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생명도 결국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께 맡깁니다. 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큰 위로를 주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이 마음을 만져주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 하고 확신을 주시며 사인도 주십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때 혼자 예배한 게 아닙니다. 여덟 명이 같이 예배했습니다. 얼마나 서로를 의지하고 또 세워주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공적 예배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됨을 정말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그 능력과 평화를 맛볼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예배입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예배의 자리에 왔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예배를 드립니다. 안 믿어도 예배의 자리에는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3)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4-5절)

 

노아에게 이제 7일이 남았습니다. 7일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노아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서 묵묵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실 방주 안이 그렇게 행복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창도 없고, 동물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매일 배는 흔들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까지입니까? 그 안에 영원히 있는 게 아닙니다. 1년만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생에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참 복잡하고 힘들고, 신앙생활도 힘들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날 그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주는 노도 없고, 돛도 없고, 조종간도 없고, 자기 의지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어떨 때는 빠르게, 어떨 때는 느리게, 어떨 때는 그냥 멈춰 있는 겁니다. 방주는 자기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키도 없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방주 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 있으면 네가 산다.’라는 약속을 이미 주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겁니다. 방주 안이 답답하다고 밖으로 나가면 죽습니다.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방주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배하며 나아가는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사는 것 같지만, 대부분 노년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나이 많은 분들과 대화해볼 기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사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닌 인생이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의 여정 동안에 자기 가족에 의해서, 직장에 의해서, 사업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평생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고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가 무엇입니까? ‘허무하다’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인생을 이끌어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의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계획하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소명’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가만히 놔두시는 게 아닙니다. 부르신 사람에게는 ‘사명’을 주십니다. ‘소명’은 부르심(calling)이고 사명은 해야 될 일(mission)인데, 소명과 사명을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합니다. 부르신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믿는 것은 알겠는데, 뭘 위해 부르셨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기가 알아서 자기 인생을 살다가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겨주신 사명은 하나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셨다는 것,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믿으시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과연 내가 그것을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내 인생의 배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2.   홍수 심판의 시작, 관점의 변화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0-12)

 

노아 홍수 사건을 보면, 7일이라는 날짜가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비둘기를 날릴 때에도 7일을 기다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7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본문이 창세기 7장이니까 우리는 현재 창세기 앞 부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7일이라는 날짜가 처음 등장한게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바로 7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물로 홍수 심판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새창조였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징계 혹은 형벌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엔 하나님의 이해하려 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할일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그 분도 결심을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의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노아 이후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아마도 비가 조금 많이 오는 날이면, 불안했을지 모릅니다. 장마와 같은 시기가 되면 혹시나 우리가 다시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물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며 사람들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일각에서 환경신학자들은 환경오염으로 무지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환경을 보호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이라고 말하며 환경보호를 주장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했습니다. 그래서 초반에 족보가 많이 등장합니다. 노아도 그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제가 저번에 족보안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할 때, 3번의 숫자를 언급하는 패턴이 있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에게 와서 숫자가 한번만 등장하고 2번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창세기 성경읽기에 참여하신 분들은 이것의 비밀을 발견한 분이 계실텐데요, 

9장 가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나머지 두 번의 숫자가 등장합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 (9:28-29)

 

그리고 10장부터 다시 족보가 나옵니다. 다시 마래서 족보를 기술하다가, 노아 순서에 멈추어서 이 때는 노아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4장을 할애합니다. 그만큼 그의 삶이, 그리고 홍수 사건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창세기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까?

 

오늘 제목이 결심입니다. 마음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마음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로 마음을 정했기에 홍수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자격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마음으로 믿기로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정하여 나아가는 매일, 은혜로운 일상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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