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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모세의 부르심"(부제: 하나님의 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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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모세의 부르심"(부제: 하나님의 때)

Jake's Blog 2024. 10. 1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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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애굽기 2장 11-15절, 3장 1-5절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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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출애굽기이며, 본문은 출애굽기의 중심인물인 모세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목은 ‘모세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부제를 정해보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때’ 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주로 부르심의 주체, 곧 하나님에 대해서 집중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다양한 성경 속 인물들이 부르심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타이밍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세의 부르심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때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먼저 아시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오심을 전후로 해서,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에 속해 있습니다. 보통 모든 글에는 주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성경전체에서 하이라이트는 어디인가? 당연히 예수님의 오심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오시기 이전을 다루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어디일까요? 

바로 오늘 말씀을 전하는 출애굽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곧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출애굽기 중에서도 19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출범을 알립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는 무슨 뜻일까요? 한문으로는 출=나가다, 애굽=이집트, 곧 이집트를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이전의 책인 창세기를 보면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약 400년이 지나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엄청 늘어나게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며, 여기까지가 출애굽기의 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 노예 생활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출애굽기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전체에 가장 큰 의미를 주는 본문이 출애굽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과 담판을 짓고, 열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과정을 보면 좀 의외인 부분이 발견됩니다.

오늘 출애굽기 3장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받는 때는 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물론 모세가 100세 넘게 살았으므로, 요즘 80세와는 좀 다르지만, 요즘으로 따져도 중년의 때를 지나며 부르심을 받은 셈입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좀 늦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보면, 모세는 40세까지 애굽의 왕족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히브리인이지만, 갈대상자에 있는 모세를 애굽왕 바로의 딸이 발견해서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왕궁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알려져서 소문이 퍼지게 되고, 바로 왕의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로왕은 이 일을 알게되어 모세를 죽이고자 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죽음을 피해서 미디안이라는 지역으로 피신을 갑니다. 미디안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입니다. 거기서 그는 애굽에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미디안 땅에서 결혼을 하고, 처가의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집트와 미디안의 위치

그렇게 40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왕족으로 40년, 그리고 양치는 자로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가 되던 해,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애굽의 왕이 나이가 들어 죽게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그게 바로 본문 3장입니다. 모세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이곳 저곳을 다니며, 양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호렙이라고 불리는 산에 도착합니다. 그는 거기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떨기나무는 시내 광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종의 가시덤불'(thoron bush)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나무가 타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채, 불이 계속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곤 그 곳으로 다가갑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모세야,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가진 특징은 첫 번째로 일상 속에서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야기 할 때, 무언가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사건일 것이라고 추측하곤 합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면 그가 양을 칠 때 분명 허름한 옷차림이었을 것이고, 지난 40년간 양을 쳤으니, 오늘 도착한 호렙산도 분명히 처음 오는 곳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즉, 자신이 이미 와 본 익숙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의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할 때, 무언가 큰 결심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고아와 난민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그녀가 수상 후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습니다. 그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질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답을 했을까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사랑해주세요."

세계평화를 이루는 일이 무언가 거대한 담론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의 주어진 일상에서 작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함으로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 중 한 명이었으며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비판하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이 시대의 예언자라는 평을 받았던 A.W 토저 목사는 어린시절 매우 어렵게 성장했습니다. 10대시절 오하이오에 살면서 타이어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길거리에 어느 목사가 “당신이 어떻게 구원받는지 모른다면 그냥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주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외침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집에 도착해서 다락방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목사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합니다.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작은 다락방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날, 그의 작은 다락방에서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 거대하게 다가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나의 일상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모세는 자신이 양을 치며 돌아다니던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들은 모세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어떻게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사실 그는 스스로 실패자이고 도망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해주십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보내셨다고 말하고,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묻거든,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해라. 내가 강한 손으로 그들을 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게 하고, 빈손으로 나가지 않고 그들의 재물을 가지고 나가게 해주겠다."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의 구체적인 대답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변명하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망설입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주어진 상황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바닥에 던져서 뱀을 만드시고, 다시 집어들면 지팡이가 되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모세의 손을 옷 속에 넣었다가 빼면 손에 문둥병이 걸리고, 다시 넣었다 빼면 다시 손이 멀쩡하게 낫게 되는 이적 또한 보여주십니다. 물을 바닥에 버리면 피로 변하는 일들도 보여주십니다. 다양한 이적을 목격한 모세는 과연 뭐라고 했을 까요?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제게 명령하셔도 저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저는 적격이 아닙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답답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나다. 그러니까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말을 가르치겠다."

하지만 계속되는 모세의 거부 앞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붙여주시며 결국 모세를 하나님 구원의 역사의 첫 발걸음을 떼는 사람으로서 그를 애굽왕 바로에게 보내게 되십니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는 과정을 봤을 때, 모세의 태도, 혹은 마음가짐은 너무 비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과연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 그의 자존감은 바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적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2장으로 돌아가봐야 합니다. 모세가 과거에 어떤 신분이었습니까? 바로 왕족이었습니다. 성격은 어땠을까요? 추측해보자면 자기 민족을 괴롭히던 사람을 쳐서 죽일 만큼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존감이 바닥을 쳤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존감이 바닥인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을까요? 차라리 그가 왕족이었던 때에 그를 부르셨더라면, 어쩌면 일이 더 쉬웠을텐데, 하나님은 왜 모세가 더 나이들고, 더 자신감도 없어졌을 때, 그를 부르셨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모세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출애굽기 초반에 그는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발각되어서 바로 왕이 죽이려고 해서 도망을 온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고대 왕정국가에서 왕가의 권한은 실로 막강했습니다. 근데 왕족이 사람 하나 죽인게 뭐 대수였을까요? 뭐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왜 성경에서는 왕족이 사람 하나 죽인 일로, 무슨 일이 탄로났다고 하고, 바로 왕은 왜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까요? 

몇몇 학자들은 모세의 행동에 대해서 그건 일종의 쿠테타 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모세가 자신의 힘을 기반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보려고 하다가 그 계획이 발각되고 실패하여 도피를 하게 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의 끈질긴 부르심에도 모세가 계속해서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모세가 이미 과거에 똑같은 일로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신분은 더 이상 왕족도 아니고, 그냥 도망자였고, 지난 40년 동안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자존감은 완전 바닥인데,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모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은 모세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힘을 믿고 쿠테타를 일으킨 때를 지나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때, 곧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십시오. 불임가정이었던 그가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그가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내 힘으로 자녀를 낳겠다고 생각해서 벌인 일이 무엇입니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녀를 얻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도저히 자녀를 가질 수 없다고 단념하고 포기했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십니다. 너무도 어이없어 속으로 웃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웃음까지도 들으시고 네 아들 이름을 이삭, 곧 웃음이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인생을 보면, 그가 왕족이었던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일은 그가 잘 해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도망자이고 양치기가 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일은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동일한 일을 놓고, 그것은 모세에게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가, 아니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가 아니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모세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의 내용의 문제도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이신가와 내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을 빼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하나님 앞에 힘을 빼가는 과정입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조금씩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제가 종종 첫 사역을 했던 경험을 말씀드리곤 하는데, 2006년, 병아리 전도사로 어린아이들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도 자존심도 좀 있고, 무언가를 하면 나름대로 대부분 좋은 결과 및 성과들을 내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맡은 사역이 무너져있는 교육부서였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할 수 있어’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되었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노력을 해도 도대체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름 교사진도 좋았습니다. 좋은 분들과 팀을 이루어서 사역을 해도 아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금요철야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3년’ 이라고 말씀해주시는, 응답해주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전히 힘들지만 기대감을 가지고 사역을 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차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힘듭니다. 2년차가 모두 지나고 드디어 응답받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전반기가 모두 지나고 하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저의 마음은 ‘포기’였습니다. 이건 안되는거구나. 나는 못하는거구나. 근데 그 때부터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때의 경험이 지금까지의 삶을 대하는 중요한 한 가지 자세가 되었습니다. 바로 자아를 낮추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을 넘어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차 선교여행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를 세웠던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결국 우리 자아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은 스스로의 힘을 빼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주님 앞에서 힘을 빼가는 과정이며, 주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를 떠났을 때가 2010년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아프리카 전체 대륙에서 존경받는 선교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하고 계셨고, 좋은 성품과 성실한 사역으로 많은 후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교센터, 기도원, 여러 학교와 500여개 넘게 개척한 교회 등, 선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선교사님 이름으로 된 부동산이 단 한개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노후 준비조차 하지 않으시는 선교사님께 하루는 기회가 되어 이 부분을 여쭤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높아지면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지금 이대로가 딱 좋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높아지고 싶은 유혹, 나 자신이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만심,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등. 이런 것은 사실 하나님의 때를 늦추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려놓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더욱 붙들며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온 맘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에 맞게 사용하시기를 또한 기대해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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