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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순적한 은혜" (창세기 24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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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순적한 은혜" (창세기 24장)

Jake's Blog 2024. 9. 2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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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17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18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21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22   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23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
24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25   또 이르되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26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27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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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信仰)"에서 신은 믿을 신이고, 앙은 따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길을 알려주셨다.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돕는 손길을 보내주셨다 등의 표현을 하는데, 이것을 하나의 표현으로 정리하자면,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내가 얼마나 은혜와 가까이 있는가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때, 은혜를 입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도제목을 놓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오래전 일인데요, 당시 제가 무언가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섬기던 교회의 금요철야예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기도는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사인을 보여주세요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자정이 거의 가까워가던 그 때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칩니다. 눈을 떠보니 평소에 저를 잘 아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갑자기 봉투를 내밉니다. 그러더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책을 사줘라 라고 했다는겁니다. 그래서 무슨책이 필요한지 모르니까 책값을 봉투에 넣었다는겁니다. 그래서 그 때 저는 제가 기도하던 제목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지시는 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방법 말고 또 어떤 방법이 있는가하면, 그것은 바로 오늘 제목과 같습니다. 오늘 제목이 "순적한 은혜" 입니다. 요즘 순적하다는 말을 요새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번역을 해보자면, 자연스럽게, 인도하심을 따라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함께 살펴봤듯이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위한 여정입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에게 가나안 족속 중에 며느리감을 찾지 말고, 고향에서 며느리감을 찾아오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본토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이 중대한 임무를 맡았던 신임받던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명령에 따라 고향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도착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게 12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현재 우리가 함께 보는 성경은 개역개정입니다. 예전에는 1961년도에 번역한 개역한글 판을 봤습니다. 그러다가 개역개정 즉, 다시말해 개정판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1998년입니다. 이후로 교회들이 천천히 개역개정으로 교체해서 지금은 대부분이 개역개정을 보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어렸을 때는 개역한글판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했었는데요, 12절 늙은 종의 기도를 개역개정이 아닌 개역한글판으로 다시 한번 함께 보겠습니다.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2절, 개역한글)

오늘은 제목의 ‘순적한 은혜’는 바로 개역한글성경의 12절의 표현에서 착안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삶에 순적하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함께 나눠볼 것입니다. 

제가 처음 개역한글로 성경을 보던 때, 12절의 ‘순적히’라는 단어가 굉장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오늘 일이 모두 뜻대로 잘되게’라 하고, 새번역에서는 ‘오늘 일이 잘 되게 하여’라 번역되어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되어 있지만, 저는 왠지 여전히 예전의 표현이 좀 더 좋습니다. 그리고 이 ‘순적’이라는 단어가 가진 어감이 좋습니다. 아마도 이 단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혹은 ‘인도하심’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현대적인 NIV 에서는  'successful' 로 번역했고, 고어체인 KJV 에서는 'Good speed' 라고 번역했습니다. 해석해보자면 '적당한 빠르기로 인도하소서'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들은 성격이 급해서 빠른 결론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속도가 아닌, 하나님의 속도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한글에서 ‘순적한’으로 번역한 하나님의 인도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어떤 큰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누가 와서 뭘 전해주고 간다던지, 갑자기 다니던 회사가 다른 회사에 팔린다던지 등의, 뭔가 이런 드라마틱한 , ‘아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인이구나!’ 할 수 있을만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인가 ‘일상영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 ‘영성’이라고 하면 병이 낫고 방언하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인가부터 '일상영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도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사회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한국교회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새마을운동 이후 급속도로 발전할 때, 기도의 응답, 놀라운 일들도 분명히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이 거의 멈춘 시기가 되어서야 교회가 깨달은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여담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과거에는 자기 집 전세보증금을 빼서 건축헌금을 했다는 간증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때는 집을 사는 것이 지금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증금을 빼서 헌금을 해도, 다시 보증금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많이 다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믿음의 척도라는 것이 꼭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대단한 헌신을 하는 것만이 믿음의 척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 없더라도, 그저 맡겨진 곳에서 그대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절대 작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오늘 주제로 돌아와서, ‘순적한 은혜’가 결코 작은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순적한 은혜' 속 에는 어떤 놀라운 기적같은 일들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내 삶이 순적하여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쩔 때는 때에 맞게, 때로는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이 바로 '순적한 은혜' 입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놀라운 은혜도 있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차분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아무 탈 없이 우리를 지키시는 순적한 은혜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청년부 사역을 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이성교제와 결혼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연애가 아닌, 결혼상대자를 어떻게 알 수 있냐? 이것이 아주 핵심 질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결국엔 이삭의 결혼 상대자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인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그렇게 이야기하면, 자매들은 교회 안에 괜찮은 형제가 없다. 반대로 형제들은 교회 안에 괜찮은 자매가 없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보면 꼭 몰래 만나다가 들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각자 알아서 할거기 때문에 두루뭉실하게 질문을 피해 답을 합니다. 

"기도하면서 잘 기다려보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가정을 이룰 때 기뻐하실지 고민해보세요."

 

그러면 그 다음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사모님이랑은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셨어요?"

이제부터는 제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대답을 잘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재미있게 농담처럼 말씀드리고 있지만, 사실 청년들이 결혼 상대자와의 만남에 대한 질문을 물을 때마다 제가 정성을 다해서 해주었던 대답이 바로 오늘 본문인 창세기 24장 12절이었습니다. 바로 ‘순적함’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 인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몇몇 자매들은 난리납니다. ‘그게 뭐에요 사랑한다고 하셔야죠!’  아마도 이러한 대답에는 순적함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하나님도 하지 않은 결과라는 오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주제인 '순적한 은혜'에 관하여 한번 고민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혼기에 찬 청년들에게 얼마나 많은 결혼 상대감들이 지나치겠습니까? 학교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그럴듯하게 어울릴법한 수 많은 상대감들과의 인연들과 지나치게 됩니다. 그런데 인생은 결국 그 중에 한명과 가정을 이루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우물가에서 여인을 기다립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으러 왔겠습니까? 하지만 그 중에 딱 한 사람, 바로 '리브가'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드라마와 같은 방법으로 배우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내가 현재 만나고 있거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의 배우자가 될 것을 직감합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방식이 다양한 것 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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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 가기 전에 교육부 사역을 할 때, 교사로 봉사하던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거리는 여대생들이었습니다. 제가 가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냐고 물어보면 모르셔도 되요 라고 대화에 껴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조금 미안했는지 저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중에 결혼하시면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는데, 그래도 고민을 해보고 조금 생각을 하다가 ‘아프리카’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아프리카까지도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나름의 심오한 뜻이 있었는데, 질문을 했던 그 자매는 제 입에서 아프리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앗! 누군지 몰라도 그 분 너무 불쌍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제가 미국으로 유학갔다가 뉴욕의 한 인근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 케냐로 단기선교를 인솔하게 되었습니다. 그 팀에 저희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사실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단기선교 준비하고, 단기선교 기간동안 지켜보니 그 때 좀 저희 아내가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의 아내는 유학을 마치고 단기선교가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귀국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돌아가서 잘 지내라고 하고 작별을 했습니다.

그게 7월인데, 3개월 뒤 10월에 제가 학회 참석차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부산이었는데요, 그 때 같은 기간에 저희 아내가 연주회 일정으로 부산에 방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학회는 들어가지 않고 데이트를 열심히 했습니다.

결혼으로 가는 과정까지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되었죠. 심지어 상견례는 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과정들이 너무나도 순조로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데 물론 사람이 좋아야 만나는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런 하나님의 순적한 인도하심이 제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될 때, 오히려 내려놓는 방법을 선택하곤 합니다. 저의 의견이나 생각, 경험들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봅니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다는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고 자꾸만 내가 결정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개입하실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보시죠. 아브라함에게로부터 임무를 받은 나이 든 종은 아브라함의 고향에 도착한 뒤 무엇을 하나요? 아까 살펴봤던 12절,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13절부터 살펴보면 굉장히 구체적으로 기도를 이어갑니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는 소녀에게 마실 물을 청했을 때, 만일 낙타에게까지 물을 준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삭의 베필인 줄 알겠습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왔다가 나그네와 그 낙타에게까지 물을 대접할 확률이 높을지 낮을지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선 낙타가 몇 마리인가 하면,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낙타가 모두 10필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났다고하니, 낙타들이 아마도 짐을 매고 왔을 것입니다. 그 다음 이동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 지도는 아브라함의 이동인데요, 이것을 반대로 보면 되겠죠. 당시 아브라함은 최소 1500km 이상을 이동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동경로

물론 늙은 종이 찾아간 고향이 하란인지 우르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곳 역시도 꽤나 먼 거리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낙타는 하루에 약 40㎞를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일 우르까지 갔다면 쉬지 않고 이동해도 최소 40일이 걸리는 여정이고, 하란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최소 20일이 걸리는 여정입니다. 굉장히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게다가 낙타에게 물을 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낙타는 수분과 지방을 몸에 저장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한번 물을 마실 때 굉장한 양의 물을 마시게 됩니다. 물론 낙타의 크기에 따라 마시는 물의 양이 다르겠지만, 평균으로 봤을 때, 약 80리터를 한번에 마십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들을 종합하면,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나그네와 함께 온 10마리의 낙타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거의 불가능입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거의 불가능한 경우의 수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이 늙은 종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물을 주지 않고 그저 지나친 여성들이 몇명이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직 물을 주었던 한 사람, 리브가에 대해서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22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낙타가 물을 다 마신 후, 늙은 종은 그 여인에게 아버지가 누군지 묻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자신의 주인 아브라함의 사촌 동생인 브두엘의 딸이라고 말합니다. 이 여성이 바로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26절과 27절 보시죠.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평생을 아브라함 곁에서 살았던 늙은 종은 하나님께서 주인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향으로 보내는 주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에 도착해서 어떻게 이삭의 신붓감을 구할지 막막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입니다.어쩌면 우리가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자녀들은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며 닮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자신의 책 "희망의 신학"에서 "분할 성취"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도 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좋은 시기에 분할하여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 때, 하나님은 "내가 잠자는 순간에도, 기다리는 순간에도, 소명에 충실할 때에도 은혜가 성취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적함을 경험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만드신 분, 나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신 분, 나를 인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잠잠한 가운데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찬양>

“하나님은 너를 만드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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