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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부르심"(Calling)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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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부르심"(Calling)

Jake's Blog 2025. 2. 1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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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베소서 4장 1-12절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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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르심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르심이라고하면 목회자나 선교사 등에만 해당되는 단어라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좀 바뀌기도 했고, 다양한 선교단체와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인해서 믿음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서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그 안에서 권력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고 고인물이 되어버리면 교회가 썩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역사를 수레바퀴로 비유하며 반복 이론을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역사를 보면 이미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고대는 신권정치, 제정일치 사회였습니다. 종교가 곧 정치였습니다. 그리고 중세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가 되긴 했지만, 대형화가 이루어지면서 교회의 리더는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사유화하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마틴루터가 강조했던 여러가지 이야기 중에, ‘만인제사장설’ 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면,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라, 당시 평신도들은 사제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우리 모두는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여전히 그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은 더이상 우리와 동떨어져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빌립보서를 살펴봤고, 오늘은 에베소서를 살펴봅니다. 두 서신 모두 사도바울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신약성경의 절반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워 갔습니다. 그리고 각 교회에 보냈던 편지가 오늘날의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에베소서로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가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고 선교여행을 다닌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배경을 좀 설명해드리면, 에베소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에베소라는 도시는 오늘날 터키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로마 제국에 있어서 아시아의 중심 도시로 해상과 육상의 무역로가 교차되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한 항구도시입니다. (인천/부산)

또한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였는데 고대시대에 선정된 세계 7대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위치하고 있어 돈과 이방종교가 성행하는 도시에서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어쩌면 당시 에베소의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곧 힘이 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4장 1절을 보면,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갇혀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주 안에서’ 갇힌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간 것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것중 하나가 바로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최초의 이단 중에 ‘영지주의자'(Gnosticism)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했습니다. 육체는 선한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여겼습니다. 보통 이단들은 중심교리가 있습니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다가 오류가 발생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다른 것들을 경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단호함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유연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이 모든 육체는 악하다고 했던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똑같이 초대교회 안에 있던 자들인데,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바라봤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볼 때 가지고 있는 기준을 일컬어 ‘관점' (Viewpoint)라고 합니다. 어떤 점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각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이 일제치하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일본의 ‘침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그것은 침략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정복’이었고, 선진문물의 ‘전파’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말할 때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곧 ‘사관’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낼 때,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가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 역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옥중생활마저도 ‘주 안에서 갇힌' 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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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선택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위해서 수 많은 계획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삶이란 것이 항상 생각대로 계획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매우 곤란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계획이 틀어지면, 그 안에 어떠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이 일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우리가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다음에 나와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태어나고 원하는 때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영역에서 우리의 의견은 전혀 반영이 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을 받은’ 이라는 표현이 헬라어로(ἐκλήθητε)’라고 합니다. ‘에클레떼테’ 인데요,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가 파생됩니다. 헬라어로 ‘교회’라는 단어가  ‘엑클레시아(εκκλησια)’ 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단어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뜻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왜 주일에 함께 모여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정점의 사건은 무엇인가요?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사로, 그 죽은 나사로에게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이 사건은 바로 믿는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이전 몸은 죽고, 우리는 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 본 어게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당시 에베소의 타락한 문화와 종교를 따라 살던 사람들을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신 것처럼, 주님은 세상 가운데 살던 우리를 부르셔서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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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절과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부르심 받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성품으로 어떤 것을 꼽습니까?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 - 이 4가지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합니다. 부르심 받은 여러분들께 강조하고 싶은 성품입니다.

말씀을 보면, 이미 성령님께서 교회를,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 겸손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 은 자신을 낮추고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겸손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 분은 너무 겸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권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에 집중하여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온유(πρᾳΰτης)는 성령 안에서 잘 훈련된 성품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온유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갈5:22-23).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셋째로 오래 참음은 분노를 멀리 두라는 뜻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번역된 헬라어(μακροθυμία)는 ‘멀다’라는 의미와 ‘분노’라는 의미의 합성어입니다. 분노가 나거든 그 자리를 피하든, 아니면 다른 일을 하던지 해서 분노를 멀리 두는 것이 바로 오래참음의 뜻입니다.

넷째로 사랑 (φιλέω)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받아주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시면,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닮아가는 한 소망 안에서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공동체를 구성하는 우리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한 소망’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그들 각자의 욕망을 품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며 다투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펼치실 하나님의나라를 각자의 욕망을 따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비로소 ‘한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서로가 모두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소망’을 발견하고 ‘한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일로 우리가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름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 위함인데, 7절을 보시면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물 곧 은혜를 받게 됩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런데 7절을 잘 보시면 ‘분량'을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는 내용과 양이 다릅니다. 이것은 불공평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 가운데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각각 다른 역할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양의 헌신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헌신을 기초로 해야합니다. 

예전 교회에서는 임직식이 항상 논란이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의 직분이 섬김을 위한 것인데, 시대가 바뀌면서 마치 이것이 교회안에서 하나의 계급처럼 이해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하루는 임직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전도회 분란이 있습니다. 되야 할 사람이 안되고, 안되야 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저 집사님은 권사임직교육을 빠져도 봐주느냐 그럽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계셔서 교육을 못 나오면 과제로 대신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저 사람은 권사가 되면 안된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다름과 틀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것입니다. 교회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나됨과 연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것들을 자꾸만 나에게 맞추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바뀌기보다는 상대방이 바뀌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합이 아닙니다. 진정한 연합은 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1-12절은 우리가 한 부르심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각자 다른 역할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12절은 그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역할을 통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이 중에 어떤 모습에 더 가까운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 부활을 증거했던 사람들입니다. 정통성, 교회가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중심을 지키는 사람들 

선지자 -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주께서 주시는 새로운 뜻에 민감한 사람들

복음 전하는 자 - 교회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노방전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인구가 20퍼센트정도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 15%로 감소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교인 수를 점검할 때 항상 허수가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려고 숫자를 부풀려서 보고합니다. 현실적으로 10% 초반대로 봅니다. 최소한 자기 자녀만이라도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와 교사 - 번역을 살펴보면 이것이 조금 아쉬운 번역입니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하나의 기능직입니다. 구약시대에 레위지파가 모든 제사를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생업에 종사할 수 없다고해서 다른 지파에서 십일조를 내어 레위지파도 생활이 가능하게끔 했습니다. 목사는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다른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올바른 번역은 무엇인가 하면, ‘돌보는 자와 가르치는 자' 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연락하고 만나면서 돌보는 것입니다. 또한 아직 믿음생활을 이제 막 시작했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보고 가르치는 역할이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됩니다.

이 모든 역할들로 우리를 각각 다르게 부르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심받은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에 이를 통해 우리가 온전케 되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이 질문이 필요합니다.  과연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고 나를 어떻게 부르셨는가? 한 마음으로 우리는 연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가까이 닮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는 최근 섬김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은 예배 후에 2025년에 대해서 여러가지 상의를 하고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3월 첫주 쯤에 모든 분들께 보고를 드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회 안에 무언가 조직을 만드는 것이 어색한 분들도 계시고, 또 반대로 굉장히 익숙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동의해야하는 한 가지는 바로 우리가 선한 방법으로 연합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위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노력의 일환일 뿐입니다. 부르심 받은대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위원회도 그렇고, 우리 모든 가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구하면서 계획도 세우고 상의도 하지만, 저는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온전하게 세워져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함께 세워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항상 기억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제가 첫 사역을 할 때, 저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정말 저를 부르셨나요?” “그렇다면 부르심의 증거를 보여주세요. 사역의 열매를 보여주세요.” 그 때의 기도와 경험이 지금까지 제가 나름대로 한 길로 걸어올 수 있었던 힘과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와 선교사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맞게,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며, 또 한 마음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세워가면 좋겠습니다. 

[찬양] 

나는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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