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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교회란 무엇인가 "(빌립보서 1장 20-30절) 본문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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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평일 저녁 늦은 시간에 친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목사님, 우리 좀 도와줘!” 라고 말합니다. 상황을 들어보니, 저녁식사를 하고, 아이를 재워놓고 대화를 나누다가 이것이 말싸움으로 번진 것입니다.
제 친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철저히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다’라고 말했고, 그 아내는 ‘자신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게 첫째이고, 구원은 따라오는 선물이다’ 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목적이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로 대화하다가 말다툼까지 번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선은 참 거룩한 부부싸움이구나 라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믿음의 목적 vs 믿음의 선물
저는 그 친구에게 중매결혼과 연애결혼으로 답을 해주었습니다. 중매결혼은 결혼을 목적으로 사람을 소개를 받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연애결혼은 이미 연애를 하고 있다가 결혼할 시기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무엇이 맞는 결혼일까요?
네, 둘 다 맞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서 현재 어떤 가정을 이루고 있는가?’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믿는 것과 믿다보니 구원을 얻게 된 것 모두 참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래서 지금 오늘 나의 믿음이 어떤가 라는 부분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둘이 믿음과 관련하여 이런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나름 잘 살고 있구나 라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중세에 믿음의 기초를 다졌던 유명한 신학자 중에 한명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열망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올바르다”
때로는 내용보다, 결과보다 방향이 중요한 법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어떠한 의문들, 갈등이 있을 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히려 진실된 깨달음을 줄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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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빌립보서 1장으로 ‘교회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 읽은 본문은 ‘삶과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福音)'이라는 말은 한자로(福音) 복복에 소리음자를 넣었습니다. 다시 말해 복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는 이를 Good News 라고 했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데 Ευαγγελιον , Ευ - 좋은/기쁜 이라는 뜻이고 αγγελιον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실 자체 혹은 개념을 말하지만, 헬라어는 그 소식을 전하는 행위와 주체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할 때, 믿음 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과 태도를 바꿉니다. 이것은 ‘복음의 신비’ 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저희가 지난 성탄에 방문했던 고아원, 아동복지시설의 남자원장님은 제주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런데 40대 때 폐결핵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원래 죽은 목숨인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고 믿으며, 인생의 후반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이자 고아들의 아버지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죽을 뻔 하였다가 다시 살아났기에 이전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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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믿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번번히 이 부분에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옛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새롭게 복음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없는 과거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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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가 철예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 집을 떠나지 않는 노예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새로움을 시도하지 못하는 개인, 가정, 그리고 교회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변화를 시도해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익숙함을 넘어서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새로움도 어느새 익숙함으로 변합니다. 균형을 잡고 자신을 잘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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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오래 전에 한국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에 광복 곧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해보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달려나와 함성을 질렀을 것 같지만, 실제론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다. 굉장히 조용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변화를 즉각적으로 수용하지 못했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에 반해 일본 측 반응은 달랐습니다. 해방이 되었다고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사탄과 같은 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일본군 측에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신문기사를 냅니다. 그리고 광복 직전 일본 헌병이 약 2600명이었다고 하는데 광복 직후 16000명으로 증원을 합니다. 원래 변화를 거부하는 악한 세력들은 무언가가 정해지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조선 사람들도 이제는 일본에서 벗어나서 해방된 민족으로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되는 겁니다. 악한 세력의 방해와 잘 변하지 않는 주변환경과, 각자의 약한 마음이 여전히 과거로 붙잡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암살'이라는 영화인데요 이 영화 마지막에 명대사가 나옵니다.
저는 변절한 독립운동가 염석진 역을 맡았던 이정재 배우의 대사가 인간의 약한 본성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대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끌려가실 때,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만일 나중에 누군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저렇게 물었을 때, “왜 예수를 팔았나?”, “왜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나?”
“부활하실지 몰랐으니까!”
연약한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살아계셔서 역사하실줄 몰랐으니까,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실 줄 몰랐으니까, 그렇게 몰랐으니까 부족한 확신으로 인해 여전히 과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이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죄의 습성이 남아있습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빛 보다는 어두움을 선호하는 습성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복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처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권리이자 책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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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유럽의 첫 교회입니다. 바울이 환상 속에서 성령의 지시를 받아 마게도냐로 건너가 유대인도 드물고 따라서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던 도시에 세운 첫 교회이니만큼 빌립보 교회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또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을 지원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고 사도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나 어려운 교회를 위하여 도움이 필요할 때 허물없이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였기에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였습니다. 자연히 그 교회가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바울은 다시 그 교인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 있었고 언제 풀려나서 다시 빌립보를 방문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고 튼튼히 서있다는 소식이라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에게 당부를 합니다.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말하며, 당신들이 나의 자랑입니다.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어울린다’는 말이 있다. 오늘 본문 27절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에서 ‘합당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어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이미 암묵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4-5년 전에 라스베가스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호텔마다 카지노가 있었습니다. 라스베가스의 지인이 호텔을 소개하며 재미삼아 1불을 넣고 저보고 눌러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 속에서 ‘어 혹시.. 이거 뭐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쓸데없는 기대가 생기는 겁니다. ‘방송을 보면, 잭팟이 터지면 와서 인터뷰도 하던데, 축하합니다! 직업이 무엇인가요?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목사입니다!’ 라고 하면 안될 것 같은데,, 그리고 버튼을 눌렀습니다. 당연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장난으로 재미로 라고 말해도, 도박과 목회자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식당에 갔는데, 승복을 입은 단체손님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은 고기가 들어있는 탕과 국밥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모두 쳐다보았습니다. 진짜 스님들인지, 아니면 뭐 영화촬영 같은데 참여한 배우들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 장소와 그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합당하다’ 는 표현, ‘어울린다’ 는 표현은 이미 우리에게 어울리는 행동, 삶의 양식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천국시민의 걸 맞는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막연하게라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분과 대화를 하는데, 저는 예수쟁이들이 싫어요. 이렇게 말하는겁니다. 왜 그런지 묻자 학창시절에 친구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친구가 목사님 딸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글로리 드라마를 보면서 그 친구가 떠올랐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쟁이들은 말만 잘할 뿐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는겁니다. 과연 삶이 변화되지 않은 믿음을 진정한 믿음입니까?
하루는 저희 아이가 ‘~ 쟁이’라는 말을 배워왔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 누구는 ‘개구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완이는 개구쟁이야? 아니! 그럼 엄마는 개구쟁이야? 아니! 그러면서 생각을 하더니 엄마는 자꾸 나한테 뽀뽀를 하니까, 엄마는 ‘뽀뽀쟁이’야! 그럼 주완이는, ‘나는 초코를 좋아하니까 나는 초코쟁이!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쟁이라는 말을 할 때, 이것은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에서 혹은 그리스도인들을 비하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쟁이라는 말은 실제로 그런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쟁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27절을 보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같이 당부합니다.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라는 표현에서 '생활하라'는 동사는 원어로 시민답게 살으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나라 시민인 것을 기억하고 그에 어울리는/합당한 말과 행동, 삶의 양식 등으로 살아야 합니다. 빌 3:20에 따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군대의 전역군인들이 로마군대에 헌신한 대가로 로마시민권을 받고 살도록 허가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시민들보다도 더 로마적인 삶을 구가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의 언어를 사용하며 로마인들처럼 옷을 입고 로마인들처럼 먹고 마시며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는 빌립보 시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그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시민권은 로마의 시민권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임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예전에 한 교만한 청년이 저에게 다가와서 자신은 신실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에 꽤 만족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의 목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키고 있는 것은 대략 20개 정도인데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기 전까지 그것만 지키면 된다는겁니다. 밥먹기 전에 기도하기. 한가지 선행하기 잠들기 전에 기도하기 등등. 그러면 신앙생활이 쉬워진다는겁니다. 이것은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이었습니다. 자신이 지켜야할 것들을 정해놓고 지켰던 사람들 누구인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물론 노력하는 모습에 칭찬을 했지만, 그런데 체크리스트를 확인한다고해서 이것이 하나님나라 시민답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단순 행위가 아니라 열매를 봐야합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것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를 이, 끝 단 - 믿음의 결국 곧 비슷한 모양새를 가졌지만 영혼의 구원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것을 구별해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삶에서 어떤 열매를 내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늘나라 시민인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장 34-35절)
이 말씀은 오늘 본문 중에서 빌립보서 27-28절과 연결됩니다.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본문에서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개인적으로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협력을 해야하는데, 우리 안에 싸움이 많습니다. 제가 예전에 나름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면서 새가족반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에 오게 되셨는지 물어봅니다. 당시 그 지역에 큰 교회가 4개 정도 있었는데, 요즘 대부분 새가족은 수평이동이라 거의 다른 교회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온 이유는 교회안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있어서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농담으로 안싸우기만 해도 부흥을 하겠구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는 이웃에게 읽혀지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편지를 읽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의 유래는 어디서 왔을까요? 이 표현은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스스로를 규정했던 표현이 아닙니다. 이 용어가 처음에 등장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지칭했던 표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
크리스천의 뜻은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나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복음으로 인해 한 가족이 된 사람들과 함께 서로 도와가며 협력해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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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떤 방송을 보는데, 어떤 사람이 노란 리본 배지를 달고 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여성분이 배지좀 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정치적 색깔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겨워서 그래요’ 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노란배지를 달고 있던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일 선생님 자녀분이 그렇게 되어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여성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다르죠!" 그러자 그 말은 들은 그 사람은 화를 내며 말합니다.
"그게 왜 다릅니까?, 어떻게 다를 수 있습니까? 선생님 자녀랑 다른 사람 자녀랑 왜 달라야 합니까? 자녀를 잃은 분들의 가슴에 못 박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했던 분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게 만약 나의 일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공감의 마음이 필요하고, 사자성어로 '역지사지'의 마음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기억하시겠지만,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이 있을 때, 혹은 아픔이 있을 때마다 종종 강조되었던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
빌립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서신에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왜 시대적 아픔이 있을 때에 이 성경구절이 등장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사회가 기대하는 교회의 역할과 이 성경구절이 잘 어울린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울리는 합당한 일들을 감당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저희가 고아원을 방문하고, 외국인노동자들 숙소에 세탁기를 선물하고, 이웃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이런 모든 행위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설교 시작 때 나누었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열망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올바르다.’ 이 말을 ‘올바른 교회가 된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서 말씀드리면, 우리 삶을 살아내고 있는 가정은 또 다른 의미로 작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합당한 일들, 사역들을 해나가는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2025년에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가정, 믿음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가정과 교회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곧 교회를 통해 가정이 선한 영향을 받게 되고, 반대로 믿음의 가정들이 세워져가면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져 갑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가정, 그리고 믿음의 교회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다면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믿음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민감하게 마음을 열어 그 뜻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OO야,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OO 이란다."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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