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주일설교문_“새로운 인생”(행 9:1-19) 본문
라디오스타라는 프로그램에서 배우 이건주씨가 출연을 했습니다. 한지붕 세가족이라는 드라마에 순돌이라는 역할을 맡았던 아역배우였습니다. 이건주씨가 무당이 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가 자신은 살기 위해 무당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살다가 인생이 바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바꾸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바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 바뀌었다는 말은 그가 그만큼 절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그의 말을 믿음의 관점으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머리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믿음 안에서 새로운 삶을 꿈꿔봅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의 옛 사람, 나의 성격, 과거, 집안의 내력 등이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절박함이 없습니다.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살기위해 무당이 되었다는 말이 저는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모태신앙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따라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이 자연스럽지만, 절박함이나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교회는 다니지만, 교회의 문화는 익숙하지만, 지식적으로도 성경에 익숙하지만, 이것은 배우고 익숙해져서이지, 마음으로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머리와 익숙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 배운 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기대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는것과 배운 것이 전부인줄 압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율법 교육 속에 생활했습니다. 자신들이 배운 것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잘 수용을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어떠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지금까지의 삶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거듭남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곳은 요한복음 3장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를 보려거든 거듭(Born Again)나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듭남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일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은 성경에서 생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 곧 구원을 의미하고, 성령은 말 그대로 성령,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과 성령충만을 통해 우리는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사도행전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사울이라 불렸던 바울입니다. 그가 바로 그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철저한 율법주의 바라새인이었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어떠한 계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남 이전의 과정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지금껏 내가 생각하고 추구해왔던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회심입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 넣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학습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로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등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신앙적 결단을 할 때 사단의 방해가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때때로 가장 가까운 우리 지인들입니다.
아프리카를 간다고 할 때 “너 왜그래?”
미국에서 귀국한다고 할 때, “너 왜그래?”
모두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가치기준과 눈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변에 여전히 많은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굉장히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해왔습니다. 감사함도 많았지만 때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뉴욕지역에서 제가 속해있던 교단 안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수석 부목사로 사역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굉장히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윤리적으로 중대한 잘못을 했다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선배들은 저를 걱정한다면서 한다는 말이 모른척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제가 좀 그렇게 못 사는 편입니다. 잘못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고, 그것 때문에 제가 일년 정도 고생을 좀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주도에 와서, 물론 처음에는 청빙으로 왔지만, 교회 건물을 두고 나오는 과정에서 개척교회의 형태가 되었는데, 이제는 뭔가 좀 다른 길을 걸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명언 중 하나인데요,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다. (Insanity: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그래서 안해본 것들을 좀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여정을 함께해주는 신목사님이나 임목사님이 참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이 물론 고될 수 있지만 우리 모두의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교회 안에서 그냥 출석만 하던지, 아니면 이미 정해진 역할을 돌아가면서 하던지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등의 질문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회자여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기회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저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뭐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상당 부분은 저도 알고 있고, 저도 해봤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잘 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로는 교회의 성장보다 믿음의 성숙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마음으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다른 교회처럼 사이즈를 키우기 위해 그럴듯해 보이는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우선순위로 삼다보면, 처음에는 그것이 속도가 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은 모래위에 지은 집이 됩니다.
저에게 조언을 해주신 분의 말씀데 제가 별로 동의하지 않고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 분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저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하세요? 라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 분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왜 그렇게 믿는지도 모른채 믿고 있는, 그리고 자신이 무척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저 해오던대로가 아닌, 우리는 새로운 인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새로운 방식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책 중에 ‘거듭남’ 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교회에 오래다닌 사람들 중에 아직 거듭나지 못했으면서 자칭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 세상과 구별됨 없이 죄를 짓고, 물질에 욕심을 내며, 오직 자신을 위해 이기적이며, 쾌락을 따라 사는 것이 안타깝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교회에 오랫동안 다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교회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메세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문화는 알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잘 모르고, 교회생활은 하지만, 그것이 진짜 신앙생활이 되지 못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그 책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거듭난 크리스찬이십니까? Are you really born again Christian?
정말로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지금까지의 삶은 내가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께서 나를 쓰시고자 하는 방향으로 내 삶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주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사울로 살아갈 때, 다메섹이라는 도시 입구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그의 삶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도착하면 예수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잡아 넣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이 변화합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예수 믿는 자들을 감옥에 넣는 사람에서,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데 앞장서다가, 예수를 죽기까지 전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은 죽은 삶으로 여기고, 이제는 주님의 도구로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 내용이 바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때론 막연하지만 이런 새로운 인생을 꿈꿉니다. 하지만 삶의 방향이 바뀌는 정도는 각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울처럼 완전 다른 삶으로 거듭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작은 변화로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교인들로부터 받아 본 기도제목들은 대부분, 학교, 직장 등을 위한 기도제목들이었습니다. 혹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위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도제목은 ‘우리 아들이 3개월 째 방을 나오지 않아요. 밖으로 나오게 기도해주세요.’ 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새로운 인생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방을 나서는 것,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도 새로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는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을 예민하게 들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울이 다메섹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9절을 보면 그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고 말합니다. 사울이 빛으로 잃게 된 것은 오직 '시력' 뿐인데, 그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보지 '못 한 것'과 먹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는 왜 먹지 않았을까요? 음식을 먹지 않은 사흘의 시간 동안 사울은 무엇을 했을까요?
사울은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고, 바리새인이자 로마시민으로 유대인으로서는 부족함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쓴 로마서, 에베소서, 고린도전후서 등의 많은 신약성경을 보면 그는 꽤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늘의 빛과 음성은 꽤나 비 상식적이며 적어도 그에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빛 때문에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먹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의미를 알기 위해 3일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나니아를 만남으로, 아나니아가 사울을 위해 기도해 줄 때, 다시 말해 아나니아의 손과 사울의 눈이 만나게 될 때, 사울은 다시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다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울은 거듭남을 통해서, 이제는 바울로 예수를 전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만나기 전에,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때 아나니아는 사울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일컬어 '그는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 (He is my chosen instrument)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지금까지는 자신을 위해 살아왔다면 이제는 그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는 구절이 눈에 띕니다. 어쩌면 이 구절에서 우리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치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 곧 고난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영어성경으로도 'He must suffer for my name'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러한 표현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에 어떤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표현이 등장할 때, 우리는 가끔 위축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대해 선뜻 결정하기 어려워집니다. 고난 받을까 두려워집니다. 내가 거듭나서 신앙적으로 살게되면 무슨 손해를 볼 것만 같은 느낌이 우리의 거듭남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Greek 원문으로 읽게되면 조금 다른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고난(suffer)으로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pathein'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여러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성경 안에서 pathein 이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사용은 ‘감정’이라는 단어로 쓰이는 것입니다. 이 단어로의 번역이 보다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이라는 단어로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면, 사울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분명히 무언가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는 구절은, 이제 사울이 예수님과 함께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자성어로 모든 감정을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하는데요, 다시 말해 사울은 주님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은 함께하는 경험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추억할 것도 많고, 함께 위로했던 기억도 많아지며, 점점 관계가 깊어지게 됩니다. 지난 주에 서울에 다녀오며 친구들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6년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함께 공유했던 경험과 감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같은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껏 혼자 걸어갔던 인생의 길을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심과 거듭남으로 사울은 이제 바울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한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주님을 따르던, 다메섹에 살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평소 사울을 싫어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울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건넨 첫 말은 "형제 사울아"였습니다. 그는 처음 만난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아나니아는 지금까지 예수의 대적자 였던 사울의 과거를 용서하고, 이제 주님과 함께 그를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길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울이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사울을 위해서 안수기도를 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18절은 말합니다. 여기서 '비늘'로 사용된 'scale'이라는 단어는 비늘이라는 뜻 외에도 저울, 가치 평가의 기준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울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는 순간, 물리적으로 어떠한 물체가 떨어짐과 동시에 그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잣대, 가치평가의 기준들이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늘을 뜻하는 'Scale'이란 단어가 눈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을 할 때, 이것은 누군가가 눈을 뜬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잘못을 깨닫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를 했던 것입니다.
"Something like scales fell from Saul's eyes, and he could see again!"
아나니아에게 기도를 받은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합니다. (9:20)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 않았던 그의 고민,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야 인가 하는 고민이 드디어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아나니아와의 만남을 통해서, 또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의 떨어짐을 통해, 그리고 자신의 뉘우침과 회개로 그의 고민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며 기독교 공동체에 합류하게 됩니다. 예수의 대적자가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도구로 변한 첫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과 아나니아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고 우리 삶에 무언가 새로운 역사를 원하는 마음은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바램은 우리 삶 가운데 극히 드물게 나타나곤 합니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이미 자신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입술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하지만, 어떠한 특정 순간 만큼은 하나님의 뜻 보다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신뢰하고, 하나님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다른 하나님의 음성을 신뢰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배울 때,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을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대부분 나의 생각과 다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시지 않습니다. 나의 판단과 선택을 하나님께서 동조해주시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더 견고하게 하며, 우리를 더욱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삶을 간섭하기보다 뒤에서 응원하실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잘 알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옆에서 볼 때, 굉장히 잘 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을 때,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으로 묻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결정하며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인도하심 일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삶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결정이 될 것 같아서, 꼭 하나님께 뜻을 묻고 결정하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그 기도제목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 저에게 찾아와서 자신과 함께 그 일을 해보지 않겠냐면서 자연스럽게 그 기도제목이 응답된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순적하게 이루어주셨다/순조롭게 인도해주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물으며 나아갈 때, 확실하게 응답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연스러움과 순조로움을 봅니다. 어떤 크고 구체적인 사인이 없더라도, 자연스럽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으로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함께 걸어가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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