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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설교: 아도나이(ADONAI) 주 되신 하나님 (창15: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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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설교: 아도나이(ADONAI) 주 되신 하나님 (창15:1-5)

Jake's Blog 2020. 10. 22. 03:19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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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중에 ‘나의 주인’이라는 뜻의 ‘아도나이’( אדני  ADONAI)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아도나이” 라는 이름의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 창세기 15장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 전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창세기 14장에는, 아직 이름이 바뀌기 전의 아브람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전쟁에서 돌아오던 중, 아브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십일조의 시작으로 보이는, 10분의 1을 하나님께로 올려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곧 바로, 오늘의 본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언약과 축복이 재확인 됩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은 아브람에게 정말 감격스러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쟁을 끝내고 온 아브람에게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준다는 말은, ‘내가 너를 보호해주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땅에 살아가는 아브람에게 방패가 되어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시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브람의 태도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시죠.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 다 좋은데요… 전에 저에게 약속하셨던 자녀가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집에 있는 성실한 종, 엘리에셀을, 우리 가문의 상속자로 세울 예정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의 말에서 살짝 서운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하나님을 부른 그 이름을 살펴보면 아브람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 ‘주 여호와여’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 여호와여” 라는 호칭을 영어성경에서는, 대문자로 표시된 LORD 로 적혀 있습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이 쓰였던 히브리 성경으로 가보면,  “아도나이”( אדני  ADONAI) 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주, 주인, 주님” 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들 중, “주” 라고 불린 최초의 하나님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도 여러분의 하나님을, “나의 주님, 아도나이” 라고 부르고 계신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속에 진정한 주인으로 살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대답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아마 저의 그 질문에 우리들 모두들 “예” 라고 대답하셨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님, 아도나이” 라고 부르고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도나이” 라고 부를 때, 그 고백에는 어떤 구체적인 뜻이 담겨 있어야 할까요? 오늘은 이 이름 속에 담겨 있는 3가지 중요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특별한 관계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더 이상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피 로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 뒤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건가?’ 하는 아쉬운 마음이 따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도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살펴볼 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 라로 부르고, 나를 “종” 이라고 인정할 때, 그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겨나는 관계는, 이제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무언가에 끌려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아도나이” 라고 하나님을 불렀을 때는, 자신에게 자녀가 없어서 자신의 성실한 종,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던 상황에서 하나님을 부른 호칭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내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아브람은 자신과 엘리에셀을 보니, 이것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와 같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당시 “종”의 개념을 살펴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노예’의 개념과는 좀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아브람이 하나님을 “주” 또는 “주인”으로 불렀을 때의 종의 위치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종의 위치보다 훨씬 더 좋은 위치와 관계를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종을 전적으로 돌보아 주었고, 당시 “주인”은 항상 그 종의 필요를 모두 다 공급해 주고, 보호해 주었으며, 심지어는 매일 매일 대화를 주고 받는 친근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인 창세기 15장에 의하면, 종이었던 ‘엘리에셀’은 이미 아브람의 모든 권리와 축복, 그리고 재산까지도 다 물려받게 되어 있는 상속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특별한 관계가 바로 “아도나이”, ‘나의 주님’ 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지키시고, 돌보시고, 책임져주시는 분으로서의 ‘주님’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이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도나이’라는 단어는 성경의 다른 본문인, 사사기 6장에서도 등장합니다.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미디안과 전쟁을 할 때, 마치 한명하고만 싸우는 것처럼 도와주고 돌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도 바로 “아도나이” 입니다. 돌보아 주시는 주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고, “아도나이” 라고 부를 때, 그 속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 나와 동행하시고,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 으로 고백할 때 세워지는 특별한 관계가 됩니다. 자기 백성을 온전히 책임지시는 ‘아도나이’ 하나님이십니다. 

2. 순종의 요청

또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주” 또는 “아도나이” 라고 부르며 고백한다는 것은, 주인 되신 그분께서 오늘의 나를 “순종” 이라는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세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하나님은 믿지만 마음 속에서 갈등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여” “주님”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도나이” 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며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함께 살펴본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빠져나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명령을 합니다. “너는 가서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나가게 하라.”  그런데 이 때 모세의 대답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ADONAI), 저는 원래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지만, 하나님 말씀을 따를 마음은 없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정말 ‘주님’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고백과 삶의 모습이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음은 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어쩌면 우리는 반쪽짜리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머지 반을 채워가야 합니다.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주, 아도나이” 라고 부를 때에는, 우리가 단지 그분 앞에서 “주” 이라고 부르고, “제가 종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 우리가 “주님” 이라고 부른 후에, 정말로, 당신께서 원하시고 말씀하시는 일에 우리가 순종하기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주님, 아도나이” 라고 부를 때, 그 이름에는 우리들의 순종이 요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단계까지 갈때에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때, 나중에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만일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신뢰와 순종의 정도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선교를 Mission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라틴어에서 온 단어인데, ‘Missio’라는 뜻이 ‘보냄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교사, ‘Missionary’라고 하면,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오래 전에 ‘One way Missionary’ 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들 중에 선교지로 떠나면서, 왕복 배표가 아니라 편도 배표만 구입하였고, 간단한 개인 물품을 가방이 아니라, 화면의 그림처럼 ‘자신들의 ‘관’ 에 담아 항구를 떠난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 진지하게 작별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들은 그 자신들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그 선교사들 가운데 A.W. Milne (1785-1822) 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태평양에서 ‘뉴 헤브라이즈’라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스코틀랜드 위쪽 섬 지역으로 현재는 ‘바누아투 공화국’) 그곳에 살았던 원주민 교장 선생님이 모든 선교사를 살해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35 년 동안 그 부족 가운데 살았으며 그들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원주민들은 마을 한가운데에 그를 묻고 그의 묘비에 비문을 적었습니다. “그가 왔을 때 이곳에는 빛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떠났을 때 이곳은 어둠이 없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스토리가 가능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도나이’,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아도나이’라고 부를 때, 그 속에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내 안에 끝까지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무거운(진지한) 결단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아도나이” 의 의미를 살펴볼 때, 저는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는 무거움, 그리고 진지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 ‘아도나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 속에 무거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같은 말을 해도 그 무게감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똑같이 Yes를 해도, 가벼운 Yes가 있고, 무거운 Yes가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봤던 드라마의 한 장면인데요, 주인공이 밤 11시 50분에 환자의 수술을 10분 뒤로 미루자고 합니다. 장기기증을 위해서 살 가망이 없는 뇌사상태의 환자의 심장을 빼내는 수술이었습니다. 당연히 환자를 살리는 수술이 아니라, 오히려 수술을 통해 생명이 끊어지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주인공은 아무런 설명 없이 조금은 가볍지만 담담하게, “10분만 이따가 수술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피곤해 보이는 다른 의사와 간호사분들이 그냥 바로 수술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공은 “이미 늦었으니까 10분만 더 기다리시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미 늦은 밤이라 너무 피곤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다시 컴플레인을 했습니다. 수술을 10분 미뤄서 뭐하냐고, 환자가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기다려서 달라지는게 뭐가 있냐고, 다들 너무 피곤하니까 그냥 지금 바로 하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주인공이 조금은 무거운 말투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이 어린이 날이에요. 환자의 자녀들에게 아빠의 죽은 날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평생 슬픈 어린이날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요. 우리 다 힘든거 아는데, 그래도 환자 가족들 생각해서 10분만 이따가 수술할께요.” 무겁게, 그리고 단호하게 하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게 되었고, 결국 환자의 사망 선고는 5월 6일이 되었습니다. 큰 목소리 보다 조용하지만 무겁고 진지한 말에 오히려 힘이 있는 법입니다. 

 

저는 드라마의 이 순간을 보면서,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저는 이와 비슷한 감정의 상태에서 불러야 한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일종의 무거움, 진지함, 엄숙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아도나이,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에 누가 들어가는지를 말합니다. ‘착한가 안 착한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대신에 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결코 하나님을 “아도나이” “나의 주님” 이라고 단지 말로만 고백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진지하게 결단하는 하나님 자녀들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름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그 좋으신 하나님의 이름들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믿고, 그것이 내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중에 ‘아도나이’, ‘주님’이라는 이름을 살펴봤습니다. 이 이름이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고백되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진정한 ‘주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경책 안에서만 존재하고, 주일에 한번 여러분의 삶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에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 되시길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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