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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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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1-3)

Jake's Blog 2021. 1. 9. 07:46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1-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 제목에, ‘심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마음과 영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롭게 가지게 되는 생각들을 ‘관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보이는 부분에 대한 관심을 주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잘 신경쓰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팔복’으로 많이 알려진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산에 오르셔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이란 무엇인가요? 혹은 어러분은 ‘어떤 복’을 받고 싶은가요?

사람들은 흔히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자녀들이 잘 되었거나 건강하거나 장수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돈, 건강, 생명 등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 즉 ‘소유하지 않은 상태’ 가 복있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는 마태복음의 첫 번째 복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아무 것도 잠가둘 것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 (Blessed are they who have nothing to lock up) 

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잠가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생기고, 소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생기면서 전에는 없었던 염려와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이것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떻게 빼앗기지 않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더 늘리고 가져야 할지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걱정과 염려를 주는 존재가 동시에 ‘복’이 된다는 것이 모순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됩니다. 물질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성가들은 가난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거룩한 가난’(holy poverty)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성가들은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가난을 통해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놓는 훈련을 했습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물질에 대해 바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물질을 갖기 위해 삶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나누는 삶이 되는 것의 축복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먼저 본문 3절을 읽어봅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PPT한영)

마태복음의 첫 번째 팔복의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만이 아니라, 내면의 가난함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을 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건강을 잃었을 때, 학업이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삶의 큰 시련을 맞이했을 때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때, 나의 무기력함과,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마음의 가난이 절망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가난 속에서, 무엇으로 채울까… 성경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는데,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적 관점이 강한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계명을 따라서 '하나님'이란 말이 나오면 다른 단어로 고쳐서 쓰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도 '하늘나라', 하늘 '천'자에 나라 '국'자로 바꾸어서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만 '하늘나라', '천국'이란 말로 쓰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심령"이란 말이 없고 그냥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 "가난"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뜻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πνης’ [penes]란 단어이고, 둘째는 ‘πτωχός’ [ptochos] 라는 단어입니다. 예를들어, 페네스는 수입은 있지만 남는 게 없고 여유가 없는 가난, 즉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가난입니다. 

그러나 프토코스는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고, 파산을 당하거나 해서,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10초에 한 명 꼴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프토코스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하고 절대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은 바로 두 번째 프토코스의 가난입니다. 가장 절망적이고 무력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저주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꼭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하게 되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인종이나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소유’, '부', 즉, '넉넉함'입니다. 물질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것을 다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부’를 추구하고, ‘풍요’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의 이해와는 반대로, 역설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좋아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 절망한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분명히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시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부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부자의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태를 ‘복’있는 상태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의 상태가 복된 상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하지 않으면 복이 없는가?' '부자는 복이 없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언뜻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넉넉한 삶을 살아가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가난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성경에서 ‘가난함’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가난함 그 자체가 옳다고 말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보면 가난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함은 영적이든 경제적이든 하나의 '현상'일 뿐, 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잘 못 해석하여 가난한 것,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그 자체를 미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소유’라는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만일 가난 자체가 복이라면, 우리가 노력하고 발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일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난 자체를 복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 자체를 축복하시고, 또 부와 물질 자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 때문에 어떻게라도 무언가를 구걸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자 상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으로는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데, 헬라어로 보면 이 구절 중간에서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οτι’(호티), 즉 ‘왜냐하면’이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천국을 소유한 사람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즉 가난한 것, 혹은 영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가난’이라는 것은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심령, 곧 마음과 영혼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 즉 이 세상 기준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고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을 잘 믿는 부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지금 잠시 나에게 있을 뿐, 원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것을 내가 잠시 맡아두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청지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복되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 삶의 기준이, 이 세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되다, 하신 이유는 단지 ‘가난’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필요하다는 믿음 곧 ‘심령의 가난’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고, 그래서 복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유’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돈, 학벌, 경험 등, 내가 가질 수 있는, 혹은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가하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소유는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잠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와 조금 다릅니다. 우리 삶의 배경은 모두 다르겠지만, 한국의 경우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후에 경제성장이 되어서, 70년대 말부터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넉넉한 환경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있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물론 각 가정형편이 다르겠지만, 상대적 빈곤을 경험했을 뿐이지, 절대적인 빈곤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상대적 빈곤이란, 누군가와 비교해서 어려운 것을 의미하고, 절대적 빈곤이란, 모든 사람이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함께 어려운 시절을 경험하진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자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자란 분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미국은 이미 강대국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분들이나, 십대에 미국에 와서 자란 분들 모두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입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로 경제성장이 멈추고,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여러분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입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넉넉하지만, 개인의 만족도는 낮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풍요롭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역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한번쯤은 곱씹어 볼 내용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난다.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로 늘어났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서두르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엄청나게 일을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유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맞벌이가 늘어나지만 이혼은 늘고

집은 근사해지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식품은 다양해졌지만 영양가는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친구는 줄어들었다.

 

교통수단은 더 빨라지지만 소통은 더 막히여졌고

광고는 더 많아졌지만 상업 양심은 더 줄어들었다

 

쾌락을 느끼게 하는 약들은 많이 졌지만

행복을 느끼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축복’이라는 것은 결코 소유를 통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질까’, 즉 ‘소유’에 집착한다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심령의 가난함을 간직할 때,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적 소유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인데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라는 성경구절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외우기도 하는 구절일텐데요, 11절과 12절을 함께 외우는 분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11절과 12절을 함께 보시죠.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때로는 가지지 않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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