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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선교사, 존 로스

Jake's Blog 2016. 1. 24. 17:22




한국의 첫 선교사 (존 로스)

[한국의 첫 선교사] 계명대학교출판부



1. 사상의 형성(1842~1872)

만주 개신교의 설립자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웹스터 목사가 말하기를 "무례한 군중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인내와, 끊임없는 예의와 재치를 보았다. 여러 주간 매일 같이 있었으나 아무리 어려운 경우를 당해도 그가 자제력을 잃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라고 말하였다."

만주와 한국의 개신교의 설립자 및 한국을 서양에 소개한 이 사람은 바로 '존 로스'목사이다.

로스목사 가족은 크로마티 하구의 어귀에 있는 인버네스의 북쪽 닉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이 작은 농촌지역에서 존 로스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영향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로스목사의 어릴 때 성장발전에 영향을 주었던 요소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족의 배경이다. 로스목사는 여덟 아이들 중에 맏아들이었고, 그 가족들은 마을에서 식자층에 속하는 가정이었다. 1860년대 중반 존 로스는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의 신학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해외로 나가는 문제를 고민하고 1871년 말 중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서류를 제출했으며, 1872년 2월 27일에 해외 선교부는 그를 중국선교사로 선택하였고 3월 20일에 엘진과 인버네스의 노회는 그에게 안수했고, 3월 25일에 엠. 에이. 스튜아트와 결혼했다. 30세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거대한 모험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2. 선교활동 초기(1872~1879)

존 로스목사는 일본을 거쳐서 8월 23일에 중국 산동에 있는 지부에 도착했다. 하지만 지부에 이미 있었던 선교사들 중에 윌리암슨 목사의 경험에 의해 로스목사의 선교활동은 완전히 방향이 달라졌다.

알렉산더 윌리암슨은 중국에 선교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로스목사에게 나누고 겨울이 오기 전에 영구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겨울엔 요동만이 얼어서 갈 수 없었고, 그 시간동안 언어학습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에 로스목사는 응답하였다.

9월에 지부에 도착한 뒤 한달이 지나서 로스목사 부부는 영구로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영구에서의 생활이 그리 쉬었던 것은 아니다. 로스목사 부부에게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는데, 하나는 혹한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터희사와의 다툼이었다. 

로스목사 부인은 임신 마지막 달에 여행하면서 몸이 불편했는데, 그와 같은 기후는 건강상태를 더 악화시켰다. 늦은 2월 그의 아들 드러몬드를 낳았으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그녀는 결국 3월 31일에 죽어서 번즈선교사 무덤 옆에 묻히게 되었다. 

로스목사는 마음이 매우 아팠으나 계속해서 중국어를 배우고 설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계속 해갔다.

그는 사서삼경을 열심히 익혔고, 전도할 때 그것을 많이 이용했다. 

로스목사는 만주에 있는 동안 만주에 있는 교회 성장이 그의 주요한 임무였으나 조선에 대한 마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겐 개인적인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자녀를 양육할 사람이 필요했었고, 만주에서 그를 도와 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 캐더린을 요청하게 되었다. 

1874년 10월 9일 로스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를 나섰고, 첫번째로 고려문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조선상인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었으나 성경을 팔수는 없었고 그 이후, 영구에 돌아오자마자 로스목사는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고려문 심방이란 글을 썼다.

1875년 로스목사가 쓴 기록등이 많지 않으나, 만주의 수도원 봉천에 몇 개의 전도관을 설립하려고 무척 노력한 것 같다.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여행에 대한 이유로는 로스목사는 한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하려고 했었고, 다른 이유는 조선어 선생을 찾고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이응찬이란 사람을 만났고 그가 로스목사의 교사가 되어주었다. 

로스목사는 첫번째로 선교사들을 위한 중국어 교본을 저술하였고, 두번째로 조선어 교재를 저술하였다. 

1878년 로스목사는 봉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때 조선어 성경 번역을 계속했었는데 그 대 로스목사는 안식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1879년 2월, 1978년 보고서로 보냈고 1879년 5월 9일, 7년만에 처음 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3. 첫 번째 안식년(1879~1881)

1879년 안식년 로스목사는 이 기간중에 펴 냈던 두 책의 원고와 4복음서, 사도행전 및 로마서의 첫 번역원고를 가지고 갔다. 

그는 이응찬 외에도 감양선, 서상윤, 서경조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사람들과 성경번역 작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성서번역에 대한 비용을 여러 단체들에게 부탁하여서 번역작업이 어렵사리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아들 드리몬드와 영국에 도착할 때 로스목사의 가장 급선무는 1879년 6월 21일에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평범하거나 국내에서 그 이하 수준의 선교사 파송은 무의미한 것이라 말하며 중국과 조선의 선교를 위해 만주가 전략적 요충지임을 강조하였다. 

로스목사는 저술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첫 안식년에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또한 영어로 동양역사에 관한 책 등 두 권을 썼고, 연합 장로교인을 위해 중국에 대한 소개의 글도 썼다.

1881년 2월 24일 로스목사는 재혼했고, 두 번째 그의 아내 이사벨라 스트랩 맥패디언은 그의 여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드러몬드는 4월 중순 영국을 떠나 5월 25일 영구에 도착했다. 이 때가 그의 저술의 전성기였으며 39세에 로스목사의 사역은 영광스러웠던 것으로 보여진다.



4. 교회의 건설(1881~1888)

로스목사의 첫 선교 기간의 특징은 그의 문학의 성취이며, 둘째는 교회의 사회내 정착이었다. 1881년 보고서를 따르면 로스목사는 중국에 도착한 다음 신약성경 번역을 강조했고, 그해 말 누가복음이 출판되었으며 1,000권은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회 앞으로 보냈는데, 그 사람들은 조선으로 가지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로스목사의 1881년 편지를 보면, 그가 번역한 방법을 알 수 있다. 먼저 과거를 치뤘던 조선인이 중국 문리신약 번역으로부터 조선어로 옮기고, 다름에 로스목사가 각 문장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비교하면서 항상 조선인과 같이 번역했고, 문제가 생길 때는 토론했다.

그런데 1881년 말 즈음 로스목사에게 비극이 닥쳤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첫 아들인 휴(Hugh)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목사는 늘 조선어 신약서번역의 완성을 위해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1882년 그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조선인 인쇄자 김청송이 세례를 받고 간도지역에 성서 판매원으로 간 것도 중요한 사건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그해 10월 제임스 웹스터목사와 듀걸드 크리스티, 두 선교사가 와서 만주 선교회에 힘을 더 했다.

그리고 1883년 주 일본 스코틀랜드 성서회를 통해 신약이 한반도로 분배되었고, 성서회 대표자 나가사가 와다씨를 조선으로 보냈다.

로스목사가 신약을 번역할 때에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하나님, 성령, 천사 들의 용어 선택이 제일 어려웠다고 했는데,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용어를 로스목사가 택하고 만들었던 것이다.

1884년 당시 신약은 한 권으로 묶여진 것이 아니라 각 복음서가 따로따로 배포되고 있었다. 신약의 각 책들은 계속해서 출판되어졌고 만주교회도 계속해서 성장했으며, 김청송을 통해 간도 전도 역시 잘 되고 있었다.

하지만 1884년 역시 로스목사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그 때 여름 새로운 부인의 둘째 아들인 Findlay가 죽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슬픔도 잠깐, 첫 딸 마가렛 프리티의 출생으로 덜어질 수 있었다.

로스목사가 만주에 온 다음에 중국인 전도자를 통해서 600명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1888년 그 해, 만주 선교회의 소사와 유교에 관한 글을 써서 본부에 보냈다, 1887년 가을 로스목사는 배를 타고 서울에 가서 조선에서 있은 조선인의 세례와 한국 교회의 첫 장로 임명을 보았다.



5. 교회 내에서 영적인 근원들의 심화(1888~1900)

1888년 4월 로스목사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런던 선교 수양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 해, 그의 어린 아들 자키가 죽는 불운이 그에게 더해졌다.

한편 로스목사는 보고서에 조선에 대한 글을 썼는데, 불교가 민중에서 멀어진것과, 조선인은 고등신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에 기인해서 조선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이는 첫 아시아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890년 여름 로스목사는 상해의 제2차 중국 선교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름이 거의 끝나 갈 때 로스목사 가족은 또 다시 둘째 딸 캐티제인이 죽는 불운을 맞았다.

하지만 존 로스 목사는 1890년부터 1894년까지 수차례의 순회전도여행을 떠났다.

1893년 11월 로스목사는 봉천과 철령 중간에 있는 일루에 지부를 설립하려고 생각했고, 1894년 1월 봉천 전지역 특히 일루지방을 중점적으로 여행했다.

3월에 로스목사는 글래스고우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공적은 만주에서의 선교에 대한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두 저서인 'A History of Corea' 및 'History of the Manchus'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선교부는 만주에서 20년간 활동해 왔고 끊임없이 고요한 성장을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해 여름 조선의 영주권 문제를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주된 격전지는 만주와 조선의 북쪽 지방으로 교회와 선교의 모든 방면에 타격을 주었다.

많은 폭도들과 훈련 안된 여러 집단의 군사들이 기독교 단체와 중국신자들을 공격했다. 그 해 8월 요양에 있는 한 폭도가 쳐 들어와 제임스 와일러를 아주 심하게 때려 6일 후 그 상처로 죽게 되는 등 타격이 컸다. 

10월 중순 그와 가족은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건강은 거의 환자에 가까왔다.

로스목사의 건강 때문에 영국에서 그 해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여성들을 축출한다는 내용의 전보가 오자 로스목사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11월 4일에 영구에 가서 31일에 봉천에 도착하였다.

1896년 초 일반교회 활동은 정상을 되찾았고, 외국선교사들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까지 원상을 회복했다. 교회나 선교사들 어느 쪽도 청일전쟁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만큼 그곳의 주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9월 로스목사는 만주 수도 북쪽의 선교지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로 그가 생각했던 일루의 교회에 열중했다.

1898년 가을에 로스목사의 주의가 집중된 것은 교회의 가장 밀접한 관련 중 하나인 숙련된 성직자의 교육이라는 견해였다. 로스목사가 초보적 평신도 교육기관은 이미 설립했으나, 좀더 조직적이고 복잡한 신학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더 절박하게 요청되어졌다. 로스목사와 에이레교회의 펄턴은 교수들을 불러들렸고 로스목사는 새 기관의 학장이 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강사로 강의를 맡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6개월에서 매 4강좌 이상을 짜고, 강좌는 10월에 시작해서 4울에 마쳤다. 고등학교 졸업자격이 없는 학생에게는 입학시험이 부과되었다.

1989년 겨울과 1899년 초 로스목사는 대부분으 ㅣ시간을 신학생 고학년을 가르치며 보내었다.

1899년 여름엔 풀러와 통화지역으로 가서 용지를 구입하고 그 지역에서 수 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6. 마지막 선교활동(1900~1916)

20세기 초 그전 해 2,500명을 합쳐 만주 교회 교인수는 11,000명이 되었다. 모두가 교회의 발전을 확신했으나 북청사변은 이것을 짓밟았다. 로스목사가 2월 안식년으로 간 다음 시작되어 6, 7월에 크게 약탈하는 소동을 벌였는데, 이 사변의 목적은 외국인 및 그의 조직과 관계있는 중국인을 쫓아 버리는 운동이었다. 

만주 선교사는 7월 말 중국을 떠났고, 만주 북부 선교사는 불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홍경 전도자는 로스목사에게 홍경과 영릉과 통화에 있는 교회가 파괴되었고, 약 120명이 죽었다고 전하며 사망자의 이름을 편지에 기록했다. 

그 중에서 파괴가 가장 심했던 곳은 풀러목사가 설교했던 봉천 동쪽 지방인 영흥과 오경에서 였다.

1902년 선교사들은 파괴된 교회를 재건키 위해 5월에 노회 겸 선교회의를 열었다. 7월 10일 본부는 영국 대사관에 로스목사를 만주 선교회의 대표자로 임명했다. 영국과 외국 성서회 대표자 트러리의 영향을 반던 때로서 로스목사는 맹인 신자를 위해 특수 점자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4년 8월 로스목사는 전 중국 교회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가 북대하 빼이타로에서 열려 참석했다. 이곳에서는 4가지 중요한 질문의 내용이 거의 결정되었는데, 내용은 찬송가 통합 가능성, 교회와 부속 예배당의 언어통일, 상제와 성령은 하나님과 성신을 상징하는 언어의 통일과 여러 선교회의 통일 선교회 설립 등이었다.

9월 4일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목사는 만주로 다시 가서 노일전쟁 중 봉천에서 살게 되엇다. 11월 말 모든 선교사들은 자기 구역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1905년 1월 만주에 있는 선교사들은 모두 전쟁이 확산되고 소모전은 끝날 것이라 믿었다.

3월 말 일본군은 봉천에 주둔했고, 전쟁은 끝나 사람들이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5월에 노회가 모일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지만 노일전쟁으로 인해 1904년에는 노회가 모이지 못하였다.

1907년 로스목사는 봉천 북쪽 지역으로 순회전도를 한 후 봉천서남부에 있는 교회로 갔다. 같은 해 6월 안식년을 맞아 로스목사 부부는 영국으로 갔고 도중에 비인에서 잠시 머물고, 스위스 로잔느에서 여름을 보냈다.

1908년 1월 로스목사 부부는 에딘버러에서 살게 되었고 봄에 로드세이로 이사했다. 1908년 말부터 로스목사는 그의 유명한 할술책인 '중국의 원시종료'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고 이 책은 다음해인 1909년에 출판되었다.

1910년 2월 에딘버러에서 모이는 서계 선교회 참석 후 로스목사는 7월 초 외국 선교부에서 퇴직할 의사를 발표했고 이렇게 38년간의 봉사는 끝이 났다. 

하지만 병약하고 퇴직을 했어도 로스목사는 많은 약속을 지키고 여러 일을 했다. 10월과 11월에 여러 교회 앞에서 중국 교회에 대해 발표했고, 1910년 말 로스목사 부부가 마아치홀 크레센트 12번지로 이사가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1915년 4월 런던의 기독교 문학회에 참석한 로스목사는 그것이 공식적 행사로서는 최후의 것이었고 같은 해 8월 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으로 갔고 8월 11일 에딘버러의 뉴윙턴 묘지에 묻혔다.

요즘 로스목사의 후선은 영국, 호주와 남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다. 그의 제일 기념이 될만한 공적은 그가 영향을 끼쳤던 만주와 한국 사람들 및 양국의 교회에 있다.



7. 로스목사의 업적 

선교 인물 중에서 로스목사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제임스 렉만큼 위대한 학자는 아니더라도 학문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서양 언어로 첫 한국 역사책을 썼고, 영어로 된 첫 한글 문법책을 썼으며, 한글로 처름 신약성서를 번역했고, 최초의 만주민족사, 중국 고대종교 및 만주족의 기원을 쓰는 등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는 초교파적인 생각들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했고, 만주에 있는 에이레롸 스코틀랜드 선교의 연합을 위한 일을 성취시켰으며, 중국에서 단독 교회를 창설했다. 

로스목사 자신은 가장 어려운 상황 하에서 조차 그는 결코 성내지 않았다. 

그의 동료 제임스 웹스터는 그에 대해 말하기를 

"그를 알고 난 후, 그가 성내는 것을 한번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로스목사가 중국에 머무르기 전 그는 복음의 바탕을 위해 유가경전인 사서삼경을 공부할려고 마음먹었고, 이것으로 중국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중국 백성에 대한 그의 용기가 유럽 사람들이 볼 때에 그가 하나의 열정가라고 이해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과 잘 어울렸고 매우 근면했다. 아마 만주에 있는 다른 선교사가 하지 못할 만큼 넓은 지역을 자주 여행했다. 

존 로스 목사는 확실히 기독교 선교인물 중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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