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영광의 문 본문

도서 깊이 알아가기

영광의 문

Jake's Blog 2016. 1. 8. 05:07


저자: 엘리자베스 엘리엇


큰 키에 떡 벌어진 가슴과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과 청회색 눈동자를 지녔던 그 한 사람...

미국 대학 졸업반이며 교내 레슬링 챔피언에 단골 우등생이었고 학생 해외선교회(FMF)회장이며, 아마추어 시인이었고 학생회 학년 대표였던 그 한 사람... 

그리고 지금 베티를 떠나 에콰도르로 향하는 바로 그 한 사람의 이름은 스물다섯 살의 짐 엘리엇이다. 그는 그의 동역자 피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게 있어 에콰도르는 그리스도의 단순한 말씀에 대한 순종의 차원입니다. 그곳에 내가 일할 자리가 있으니 나는 당연히 나갑니다.” 

1952년 짐 엘리엇과 피트는 함께 에콰도로를 향해 샌페드로를 출항하였다. 

이 둘은 18일을 바다에서 보낸 후, 에콰도르에 도착하여 에콰도르의 동부 정글지역에 가기 위해 에콰도르의 수도에서 어느 젊은 여 교사에게 스페인어 강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동부로 이동해 티드마쉬 박사와 함께 키추아족을 만나 이런 기록을 남겼다.

“1950년에 결단했던 목적지에 드디어 도착했다. 나는 지금 기쁨이 충만하다. 그때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했더라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됐을까.”

샨디아에서 짐과 피트는 처음으로 본격 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은 키추아족 가운데 섞여서 살면서 상호 신뢰의 기초를 쌓았고, 인디언들의 생활, 건강, 언어, 교육, 출산 등 모든 것이 그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짐과 피트는 어디를 가나 검은색 작은 공책과 연필을 지니고 다녔다. 키추아 말은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들은 대로 발음을 쓴 다음 어떻게든 뜻을 알아내 외우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실력이 성장함에 따라 키추아족의 신뢰역시 성장하였다.

티드마쉬 박사가 부득이 문을 닫아야 했던 샨디아 선교사 학교를 그들이 다시 열게 됨으로써 이 곳에서 현지 아이들은 마침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날을 위해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데 공헌했다. 피트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아우카족도 그에 해당할 수 있다는 고백을 남겼다. 

한편, 짐과 피트에 이어서 함께 아우카족의 선교를 감당할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바로 에드 맥컬리와 네이트 세인트와 로저 유데리안 이었다. 

먼저 에드 맥컬리는 키 188cm에 몸무게 86kg로, 휘튼 풋볼팀에서 우승경력이 있고, 육상선수였으며, 4학년 회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2학년 초 공부를 하기 위해 호텔 야간 프론트에 취직을 했다. 그 곳에서 여유가 생겨 성경을 묵상하게 되었는데 느헤미야를 읽으며 하나님의 붙드심을 확신했다. 그리고 2학년 등록 하루 전에 자퇴를 하게 되었다. 

1951년 6월 마릴루와 결혼하여 선교사 의술학교에서 1년간 기초의학을 공부 한 다음 52년에 8개월된 아들 스티비를 데리고 에콰도르로 향하게 되었다.

한편, 정글에서 가장 반가운 소리 중에 하나는 바로 비행기 소리이다. 그리고 그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 바로 네이트 세인트이다. 그는 선교사 비행협회(MAF) 조종사로 왔는데, 굉장히 꼼꼼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항상 소모품으로 여겼다. 그리고 현재 모든 MAF 비행기는 정부의 인가로 네이트가 개발한 대체 급유장치를 장착해 보다 안전하게 정글을 날고 있다. 이렇게 발명에 독창적 재능이 있고, 기술도 뛰어난 사람이 어떻게 에콰도르에 올 수 있었을까?

그는 원래 비행기 조종사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정비 자격증과 소형 면허 등, 모든 것을 차근차근 준비해 왔다. 하지만 군에서 첫 비행교육을 시작하기 전날 밤, 상처를 발견했고, 모든 기회는 박탈되었다고 느꼈던 네이트를 공군에선 정비반 선임으로 임명하였다. 자유시간이 있었던 그 곳에서 그는 그간 소홀했던 성경을 읽었으며, 예배를 드리다가 선교지에 대한 확신을 했다.  

마지막으로 로저 유데리안은 청소년기에 활동적이었고,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9살 때 찾아온 소아마비가 그에게서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아마비를 점점 극복해 나갔으며, 1943년엔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무공훈장까지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자신의 인생을 전폭적으로 주님께 온전히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그는 결국 바바라와 결혼하여 1953년 에콰도르로 향했고, 히바로족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네이트의 말에 의하면 로저는 영혼 구원 사역에 정말 긴박성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선교사 중의 하나라고 했다. 

1955년 9월 ‘하나님의 떠미심’이 다섯 선교사 가정을 움직여 지난 수년 수개월간 계획되어 온 일이 공동 행동으로 구체화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인디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제는 아우카족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로 ‘떠밀리고’ 있었다. 

1955년 10월 2일 네이트는 타자기로 아우카 부족 접촉 시도라는 결정에 도달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현장에서의 생생한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기도후원자들에게 기록으로라도 전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들은 비행기로 아우카 족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주력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간지와 마을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아우카족의 말을 다유마라는 인디언에게서 배웠고, 장기간동안 선물을 투하하는 방법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의도가 우호적임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비행기를 타고 아우카 지역으로 가서 처음으로 아우카족의 집과 그 앞의 강 사이에 선물을 떨어뜨렸다. 처음엔 비록 아우카족을 보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카족에 대한 작전은 시작된 셈이다. 이들은 이 선물을 ‘우호적 메신저’라도 불렀다. 

두 번째로는 벌채칼을 선물하기 위해 또 비행을 했다. 이때 처음으로 아우카족을 만나게 되었고, 마음속에 강한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우리들의 선물을 받았으며 비행기를 타고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적인 접근은 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인상을 주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아우카족이 그 이후 방문에 밖으로 나와 주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스피커를 가지고 “우리는 여러분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방문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소리쳤을 때, 아우카족은 그들이 떨어뜨린 벌채칼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췄고, 에드가 내민 손에 세 명이 손을 내밀어 응답했다. 이제 접촉을 시도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신중하게 방문을 계속 할 것인지에 대한 의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6주째 이웃을 방문하였으며, 이내는 선물도 받았다. 

네이트가 비행기에서 줄을 묶어 냄비를 투하했는데 그들이 줄을 잡고 있음이 느껴졌고, 냄비를 떼어낸 후에 무언가를 묶어서 올려 보내는 것도 경험하였다.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깃털을 짜서 만든 머리띠였다. 이것은 기도의 응답이었다. 

또한 계속 진행하라는 징표였으며, 우호적 관계가 가능하며 그들이 곧 복음을 듣게 될 것이라는 격려였다. 

이들은 계속적인 방문으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였고, 마침내 여덟 번째 방문에서는 노인 같은 사람 하나가 집 옆에 서서 마치 내려오라는 듯 두 팔을 흔들었다. 

결국 다섯 남자가 ‘아우카작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확실히 그 일에 뛰어든 사람은 네이트, 짐, 에드 셋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네이트의 추천으로 로저가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동쪽부터 1호, 2호, 3호, 4호로 집을 분류하여 계속적으로 많은 선물들을 떨어뜨리며 아우카족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하루는 아우카족의 한 사람이 갈색 꾸러미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꾸려는 물건인 것 같았다. 에드는 팀 멤버들의 컬러사진을 비행기에서 줄을 통해 그들에게 주고, 갈색 꾸러미를 역시 받아왔다. 

이 선물은 바로 앵무새였다. 이것은 바로 가능성이었고 기쁨이었다. 

얼마 후, 마릴루는 아우카족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비행기로 인사를 나누긴 하지만, 계속적으로 선물을 교환하였다. 

생선요리, 땅콩, 바나나, 다람쥐, 앵무새, 질그릇, 고기요리와 훈제한 원숭이 꼬리 등, 이것들을 선물로 받았고, 짐과 에드는 고기를 시식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아우카족이 거주하는 숲 속에서 활주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결국 쿠라라이 강변 근처에 판자로 집을 짓고 알루미늄 지붕을 만들었으며, 이곳에 ‘팜비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이 곳에서 아우카족의 방문을 기다렸으며, 네이트는 비행기를 이륙시켜 이곳의 위치를 아우카족에게 알리려 노력했고, 혹시 어디선가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이들은 아우카족을 향해, 숲 속을 향해 손짓으로 몸짓으로 자신들을 알렸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노력은 금요일 오전 11시 즈음 아우카인 셋이 정글에서 나와 첫 백인 친구들과 만남으로 작은 열매를 맺었다. 급작스런 출현에 당황하긴 했지만 선교사들은 동시에 “푸에이나니!”를 외쳤다. 셋 중 유일한 남자인 그는 즉각 ‘조지’라는 별칭을 얻었다. 

피트와 다른 동료들은 단어장을 들고 말을 건넸으며, 비행기 모형도 보여주었다. 

네이트는 ‘조지’를 태워 아우카족의 지역으로 날아갔다. 그 때의 ‘조지’의 열렬한 반응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아우카 사람들이 강변에서 밤을 보낼 뜻을 표하자 세 선교사는 작은 오두막을 친절하게 내어주며 그 곳을 써도 괜찮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러나 의견에 차이가 있었는지, 나이가 어린 ‘들릴라’는 강변아래쪽으로 가버렸고 조지도 그녀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선교사들은 아우카족이 금방이라도 도착해 자신들을 마을로 초대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숲을 살펴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었다. 

네이트와 피트는 곧 아우카족의 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처음엔 그들에게 두려움의 징후가 보여 낙심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은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네이트가 아우카족의 지역을 비행기로 가 보았는데, 소수의 여자와 아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좀 의아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곧 확신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바로 남자들이 쿠라라이 강변으로 향하는 신호 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에 남자들이 팜비치로 가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드디어 이들의 노력 끝에 아우카족을 지상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전으로 오후 이른 시각 이면 그들의 이 곳에 도착해 예배가 열릴 것이라 얘기했고, 4시 반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무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 4시 반이 되었고, 무전을 기다리던 마즈 세인트는 무전 수신기를 켰다. 

계속해서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지금껏 단 한번도 무전이 끊긴 적이 없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 일은 단순히 손님 접대에 시간을 잊어 무전을 보내지 않는 상황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월요일 오전 네이트의 동료였던 조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변에서 비행기를 발견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기체가 다 뜯겨나간 상태라고 했다. 

라디오 방송국 HCJB에서도 아우카 지역에서 다섯 남자가 실종됐다는 뉴스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정오쯤 구조에 가담할 만한 인력들이 동원되었다. 

화요일엔 기대할 만한 소식이 전해지진 않았지만 구조 수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요일, 처음으로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물 위에 거꾸로 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후에 또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시체에는 둔부에 아우카족의 것으로 추정되어지는 창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목요일 인디언으로부터 에드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인디언의 손에는 에드의 시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에드가 온 이후에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인디언이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또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금요일이 되어서는 발견된 시신들 사이에서 결혼반지, 시계, 동전지갑, 공책을 통해 네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그 중에 에드는 넷 중 하나의 시체가 아니었으므로 다섯 명의 죽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토요일 오전 다섯 미망인들은 팜비치에 있는 남편들의 무덤을 보게 되었고, 마즈 세인트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은 묘지에요.”

이틀 후, 사인과 전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목격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추측에 의하면 열명의 아우카족은 유인조에 불과했고, 나머지 아우카족들이 매복을 함으로써 기습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피의 흔적이나 아우카 사람이 다쳤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음으로, 다섯 선교사들이 최후의 방책으로만 총을 사용할 것을 아우카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알리려 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요일까지만 해도 우호적이었던 아우카 사람들이 이틀이 지나서 갑자기 왜 돌변하였을까 하는 물음에도 그들의 사고방식과 배후에 있을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두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    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사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    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시 44:17-19)

그 후 다섯 선교사의 순교 일주일 후 쉘메라 성경연구소에서 기념 예배가 있었다. 

일반 세상이 보기에 이것은 다섯 젊은 생애의 허망한 낭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사에 뜻과 계획이 있으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팜비치에서 있었던 일로 여러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졌으며, 다섯 미망인들에게 편지가 쇄도했다. 그리고 미망인들은 여전히 아우카족을 위해 기도하였다. 

순교를 당한 다섯 명의 선교사들의 노력이 행여 라도 물거품이 될 까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선물 투하 비행도 재개하였고, 언어 연구 등의 노력도 계속 되었다. 

3년이 지난 후,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자신의 남편을 죽인 자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다. 아우카족으로의 입성이 성공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아우카족은 친절히 도움을 베풀며 자매로 영접하여 집도 지어주고 자기네 음식과 카사바도 나눠 주었다. 그들은 다섯 남자들이 오직 식인종인 줄만 알고 죽였다고 말했으며 본인들도 지금은 그것을 실수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로 그런 일을 하게 한 것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접촉이 이루어진 50여명의 집단 외에도 이들과 원수지간인 ‘강 하류 집단’이 또 있다. 하나님은 과연 그 강한 성으로의 입성을 허락하실 것인가...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있다.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5:9)



'도서 깊이 알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리더를 떠난다”  (0) 2020.04.26
"언어의 온도"  (0) 2017.06.13
한국의 첫 선교사, 존 로스  (0) 2016.01.24
구약성서의 신앙  (0) 2016.01.24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