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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두 번째 주일 설교_"믿음의 선택"(수 24:14-2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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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두 번째 주일 설교_"믿음의 선택"(수 24:14-25)

Jake's Blog 2024. 4. 15. 01:34

 

[도입]

오늘은 ‘믿음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눕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항상 생깁니다. 삶에서 선택이란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선택장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선택을 하는데 장애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선택을 어려워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풍성한 시대일수록 선택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난한 시절은 선택지가 하나 혹은 두개였지만, 요즘과 같이 선택지가 많은 시대엔 그 중에 무언가 한 가지를 고른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저희 아이만해도, 무엇인가를 선택하라고 하면 굉장히 주저합니다. 그러면서 아빠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고르면, 그거 말고 다른거는 어떠냐고 합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선택이 어려운건 매한가지 입니다.

선택은 왜 어려운가? 이 질문을 곰곰히 생각해보자면, 근본적으로 선택이 어려운 것은 모든 선택에 장단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두느냐에 따라 어떤 부분은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택이 정말 더 좋은 것인지 우리는 가끔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선택지 앞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을 선택하면 안되는지 금새 판단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지금까지 꽤 많은 선택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 역시 주어진 보기 안에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목회 경험을 돌아보면,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로 화합된 적은 결코 없을 뿐더러, 항상 입장의 차이, 생각의 차이로 분열이 생길 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양쪽 입장을 들어보면,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혹은 어디에 속해있는가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운동회에서는 누군가는 청군, 또 누군가는 백군이 되어서 줄다기리, 박터뜨리기 등으로 경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홀수 반은 청군이고 짝수 반은 백군으로 정해서 운동회를 하고, 선수로 뛴 것도 아닌데, 우리편이 지면 괜히 시무룩해졌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또 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팀의 편에 서서, 그 팀을 응원하며, 승리할 때 같이 기뻐하고, 패배할 때 함께 슬퍼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스포츠 경기에만 국한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어느 편에 속하는가가 생각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서운한 감정이 듭니다. 내 편이 아니라 하도 남의 편만 들어서 남편이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로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것이 우리 삶에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쪽 편에 선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어느 편에 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곤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어디에 속했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받는 영향은 생각보다 큽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휴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어느 쪽에서 태어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북쪽에서 태어나면, 지구 최고의 빈곤국 중에 하나, 자유가 없고 주체사상에 의해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남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며, 자신들이 노력한 만큼 삶을 가꿀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느 편에 속하는가의 문제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과거에 제가 아프리카에 일년간 단기선교를 떠났을 때 보았던 아프리카의 삶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저는 에이즈 환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인 에스와티니라는 나라에 있었습니다. 아마 이 나라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인구 100만명에 강원도 만한 나라 크기로 당시 평균수명 34세였습니다. 그 나라 가면 우리는 모두 원로이고, 모두 살아있는게 기적입니다. 가난하여 의료시설이 충분치 않으니 에이즈 환자들은 격리되지도 않고, 본인이 병에 걸린지도 모른채 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성인이되면,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습니다. 그 결과 배우자도 에이즈에 걸리고, 아기도 태어나자마자 에이즈 환자가 됩니다. 

그러한 현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병에 걸리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부모에게서,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는지에 따라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니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하다 이러한 고백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들을 보다가 우리 삶을 보게되면 우리도 모르게 감사가 나옵니다. 우리가 뭐 잘한 것도 없는데, 선진국인 이 나라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이만큼 살아가고 있으니 감사를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속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100년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속하는지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런데 길게 봐서 100년되는 우리 육신의 인생이 끝나면, 영원한 삶이 시작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축복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백성들은 영원한 고통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한데, 잠시 지나가는 우리 백년 인생에서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삶도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면 구원받은 천국백성이 되지만, 다른 곳에 속하게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이겁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과 구원이라는 것도 그리 복잡할게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어디에 속해야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해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영원한 축복과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질문이 이어집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속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이제는 혈통 곧 유대인이 아니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육신의 인생 가운데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 어떻게 대답해야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은 믿음의 선택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선택을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 24장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은 지도자 모세의 역할이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여호수아의 역할이었습니다. 오늘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은 우상을 버리고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고 만나를 먹으며 여기까지 왔는데요, 여전히 두 손에 우상을 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 우상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모습도 있지만 동물의 형태가 형상화 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여호와는 그 형상을 알 수 없고, 형상을 만들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도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이란, 믿음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시내산에 도착을 했던 때가 있습니다. 모세가 40일간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옵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내려왔더니 어떤 일이 벌어져 있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가락지 은가락지 다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모세가 그 돌판을 던져버립니다. 

나중에 일부 학자들에 의한 발견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이 서 계시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믿음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마음에서 비롯되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온전한 신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아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섬기던 신이던지, 아모리 사람들의 신이던지 이제는 섬길 자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애매한 위치에 서 있지 말고 분명하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말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렇게 선포하며 호소합니다. 여호수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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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그들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 중에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출애굽 2세대였습니다. 태어나보니 광야였고,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겁니다. 신앙 1세대인 부모님처럼 10가지 재앙, 홍해사건은 보지도 못해서 뜨거운 신앙적 체험 없이 부모 따라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모태신앙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모태신앙 분들도 이미 아시다시피 모태신앙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복음은 듣는데, 익숙한데, 성경책도 들고 다니는데, 복음이 실제가 안됩니다. 믿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가끔 은혜도 받는데 복음대로 안 바뀝니다. 남들은 은혜를 받는다는데, 정말 좋겠다, 정말 놀랍다. 부러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나이를 먹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니면 연차가 있어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집사가 됩니다. 그러다 집사도 오래되면 서로 부담이 되어서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회를 떠나지만 않으면 됩니다. 버티기만 하면 어지간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직분은 높아져 가는데, 신앙의 성숙은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복음이 우리 삶에 실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사역을 할 때, 어떤 유학생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연세대학교 졸업하고, 줄리어드에서 석사를 마치고 맨하탄음대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똑똑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어머니는 교회 권사님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고민이 있다는겁니다. 딸 아이를 유학을 보내놓고 너무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공부를 해야하는데 교회에서 리더를 맡으면서 신앙생활을 너무 열심히 해서 걱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말이 더 가관입니다. 너무 은혜를 받아서 혹시라도 목회자에게 시집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명색이 권사라는 분이 글쎄 그걸 신앙 상담이라고 하는겁니다. 그게 저에게 할 말입니까? 권사라는 분이, 신앙상담이라고 하는 말이, 자기 딸이 은혜 많이 받을까봐라니요. 

그런데 사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연차가 쌓이면서 직분은 높아져 가는데, 교회 생활이 익숙은 해져가는데, 신앙의 성숙은 일어나지 않고, 삶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신앙생활,, 모를 때는 오히려 고민도 없을텐데,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데도 자신의 삶은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럭저럭 알고 있지만 현실은 현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씀대로만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적당히, 뜨뜨미지근한 신앙을 균형잡힌 신앙이라고 믿으며 삽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예배나, 예전에 말씀사경회, 부흥회가 있으면 좋은 자리는 꼭 이런 분들이 앉습니다. 그러면서 "집사님은 은혜받아야 하니까 앞으로 가~ "예배는 나와서 적당히 중간이나 뒤쪽이지만 그래도 잘 보이는 자리는 대체로 모태신앙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더 가까이 갈 마음은 없습니다. 

교회생활이 익숙한 권사님, 장로님들의 농담인데요, 어쩌다가 자기들 옆에 신앙생활하던 사람들이 은혜 받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몇년 뒤에 까무잡잡 새까만 얼굴로 마른 얼굴로 나타나서 어디 선교사로 갔다왔다면서 선교보고 하는 것들을 듣습니다. 그래서 선교보고를 들으며 속으로 다짐을 합니다. 은혜는 받아도 너무 많이 받지 말아야지, 적당히 받아야된다고 생각하는겁니다. 은혜는 받아도 변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주님이 보시면 언제나 보이는 자리, 하지만 잡으려면 언제나 안 잡히면 거리, (주님이 한걸음 다가오면 한걸음 물러나고 한걸음 물러나면 한걸음 다가서면서) 주님과의 거리를 기가막히게 유지하는 놀라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디모데서의 경고처럼 이렇게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살다보면, 복음의 능력은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선택하신 분들은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 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을 살펴보니,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주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제가 종종 사용하는 표현 중에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보는 만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요즘에 길가에 차를 대로 고사리를 찾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무리 가도 고사리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들은 봅니다. 본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보이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었습니다. 저희 아이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주완아, 저게 무슨 산인지 알아?" 저희 아이는"응!"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당연한것을 왜 물어보냐는 듯이 저를 쳐다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쪽은 무슨 산이야?"    그랬더니 저희 아이의 대답이 가관입니다. 자신있게 말합니다. "산방산!"

아는 만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똑같은 광야생활을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이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제 힘으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바로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말하면서,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우로 너희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는 것으로 본문이 끝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믿음의 선택이 요구됩니다. 

여러분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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