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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함께 세워가는 믿음"(2024.05.19_성령강림주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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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함께 세워가는 믿음"(2024.05.19_성령강림주일)

Jake's Blog 2024. 5. 19. 22:03

본문: 에베소서 4장 1-12절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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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교 수업 중에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란 과목이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믿음을 일컫는 말이고, 신학은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학문이 사실 성경을 근거로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연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조직신학입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조직적으로 이해하고자 접근한 것이며, 전통적으로 다음 7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1. 신론 - 하나님은 누구신가?
  2. 인간론 - 인간은 누구인가?
  3. 기독론 -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4. 구원론 - 구원이란 무엇인가?
  5. 성령론 - 성령은 누구신가?
  6. 교회론 - 교회는 무엇인가?
  7. 종말론 - 종말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보통 학습을 하다보면, 교과서 앞쪽만 열심히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뒷 부분은 잘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도 조직신학에 대해서 여러개의 수업을 듣지만 정작 뒷 부분을 자세히 다룰 기회가 많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홀대받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교회론'은 신학이 아닌, 신앙적인 부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유학시절 중에 목회를 병행하며 박사과정에 있던 한 선배가 문득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다른 그 어떤 주제보다 ‘교회론'이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을거에요."

그 당시 저는 막연하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말이 공감이 됩니다. 사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령님이 누구신지 등등의 질문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그래서 이견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 초대교회 기록이 아주 조금 나와 있을 뿐,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는 내용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론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곳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앙의 내용은 동의를 하지만, 그 신앙을 이끌어 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교단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론과 관련해서는 다른 어떤 주제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믿음의 방식 곧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직신학의 다른 주제들보다 중요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열망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올바르다.” 

우리 안에 도덕과 선을 향한 마음이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열망할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게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열망 곧 뜨겁게 그것을 바래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계속해서 바울서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워 갔습니다. 그리고 각 교회에 보냈던 편지가 오늘날의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에베소서로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에베소라는 도시는 오늘날 터키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로마 제국에 있어서 아시아의 중심 도시로 해상과 육상의 무역로가 교차되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였는데 고대시대에 선정된 세계 7대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위치하고 있어 돈과 이방종교가 성행하는 도시에서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터의 모습

어쩌면 당시 에베소의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곧 힘이 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4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갇혀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주 안에서’ 갇힌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간 것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도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것중 하나가 바로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최초의 이단 중에 ‘영지주의자'(Gnosticism)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했습니다. 육체는 선한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여겼습니다. 보통 이단들은 중심교리가 있습니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다가 오류가 발생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다른 것들을 경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단호함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유연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이 모든 육체는 악하다고 했던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똑같이 초대교회 안에 있던 자들인데,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바라봤습니다.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볼 때 가지고 있는 기준을 일컬어 ‘관점' (Viewpoint)이라고 합니다. 어떤 점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각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이 숫자 하나를 놓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 명은 이 숫자가 '6'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한명은 '9'라고 말합니다. 과연 둘 중에 누가 맞을까요? 그렇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이것은 어디를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숫자로 읽혀지게 됩니다. 즉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점'의 차이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가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 역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옥중생활마저도 ‘주 안에서 갇힌' 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Birth  -  Choice  -  Death

영어 알파벳 B와 D 사이에 C가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B는 Birth 출생 이고, D는 Death 곧 사망입니다. 그리고 C는 출생과 사망 사이에서 Choice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위해서 수 많은 계획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삶이란 것이 항상 생각대로 계획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매우 곤란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계획이 틀어지면, 그 안에 어떠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이 일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바뀐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v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우리가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다음에 나와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태어나고 원하는 때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영역에서 우리의 의견은 전혀 반영이 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을 받은’ 이라는 표현이 헬라어로(ἐκλήθητε)’라고 합니다. 발음은 ‘에클레떼테’ 인데요,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가 파생됩니다. 헬라어로 ‘교회’라는 단어가 엑클레시아(εκκλησια) 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단어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뜻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왜 주일에 함께 모여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정점의 사건은 무엇인가요?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사로, 그 죽은 나사로에게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이 사건은 바로 믿는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이전 몸은 죽고, 우리는 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 본 어게인(Born Again)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당시 에베소의 타락한 문화와 종교를 따라 살던 사람들을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신 것처럼, 주님은 세상 가운데 살던 우리를 부르셔서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2절과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v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부르심 받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성품으로 어떤 것을 꼽습니까?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 - 이 4가지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보면, 이미 성령님께서 교회를,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 겸손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 은 자신을 낮추고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겸손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 분은 너무 겸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권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에 집중하여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온유(πρᾳΰτης)는 성령 안에서 잘 훈련된 성품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온유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갈5:22-23).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셋째로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은 분노를 멀리 두라는 뜻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번역된 헬라어(μακροθυμία)는 ‘멀다’라는 의미와 ‘분노’라는 의미의 합성어입니다. 분노가 나거든 그 자리를 피하거나 다른 일을 해서 분노를 멀리 두는 것이 바로 오래참음의 뜻입니다.

넷째로 사랑(ἀγάπη)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받아주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v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닮아가는 한 소망 안에서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공동체를 구성하는 우리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한 소망’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그들 각자의 욕망을 품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며 다투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펼치실 하나님의나라를 각자의 욕망을 따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비로소 ‘한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서로가 모두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소망’을 발견하고 ‘한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일로 우리가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름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 위함인데, 7절을 보시면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물''은혜'를 받게 됩니다.

v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런데 7절을 잘 보시면 ‘분량'을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는 내용과 양이 다릅니다. 이것은 불공정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 가운데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각각 다른 역할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양의 헌신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헌신을 기초로 해야합니다. 

제가 과거에 사역했던 교회에서는 임직식이 항상 논란이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의 직분이 섬김을 위한 것인데, 시대가 바뀌면서 마치 이것이 교회안에서 하나의 계급처럼 이해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하루는 임직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전도회에서 소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슨, '되어야 할 사람이 되지 않고,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살펴보니, 왜 저 집사님은 권사임직교육을 빠져도 봐주느냐 그럽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계셔서 교육을 못 나오면 과제로 대신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저 사람은 권사가 되면 안된다고 우겼던 것입니다. 

'다름''틀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것입니다. 교회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나됨과 연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다른 것들을 자꾸만 나에게 맞추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바뀌기보다는 상대방이 바뀌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합이 아닙니다. 진정한 연합은 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과 12절은 우리가 한 부르심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v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v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각자 다른 역할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12절은 그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역할을 통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 사도들은 초대교회 안에서 부활을 증거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모이게 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나타내고, 교회가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도 교회가 다른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성도를 뜻합니다.

선지자 -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에 더욱 민감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뜻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하여 공동체가 말씀에 비켜가지 않도록 돕는 성도를 뜻합니다.

복음 전하는 자 - 교회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노방전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번 어린이날에 아이들에게 과자 가방을 선물했습니다. 저는 이것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인구가 20퍼센트정도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 15%로 감소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교인 수를 점검할 때 항상 허수가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려고 숫자를 부풀려서 보고합니다. 현실적으로 10% 초반대로 봅니다. 최소한 자기 자녀만이라도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겁니다. 

어린이날 과자가방 선물을 받은 임수인 어린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와 교사 - 번역을 살펴보면 이것이 조금 아쉬운 번역입니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하나의 기능직입니다. 구약시대에 레위지파가 모든 제사를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생업에 종사할 수 없다고해서 다른 지파에서 십일조를 내어 레위지파도 생활이 가능하게끔 했습니다. 목사는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다른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올바른 번역은 무엇인가 하면, ‘돌보는 자와 가르치는 자' 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연락하고 만나면서 돌보는 것입니다. 또한 아직 믿음생활을 이제 막 시작했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보고 가르치는 역할이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 모든 역할들로 우리를 각각 다르게 부르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심 받은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에 이를 통해 우리가 온전케 되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에 이 질문이 필요합니다.

과연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고 나를 어떻게 부르셨는가?

 

한 마음으로 우리는 연합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까이 닮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최근 예배장소 이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이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녀들이 모인 우리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일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더 나은 변화의 결정들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구하면서 계획도 세우고 상의도 하지만,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온전하게 세워져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함께 세워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 후 찬양]

나의 맘 받으소서 오셔서 주님의 처소 삼으소서.

나의 전부이신 주여 내 맘을 받아주소서.

오, 나의 맘을 주님께 열었으니

주여 내게 오셔서 내 맘에 거하여주옵소서.

주가 기뻐하는 주의 성전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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