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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첫째 주일 설교_"인도하심"(사무엘하 7장 18-29절) 본문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23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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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하다"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남을 이끌어 지도하다' 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도움을 전제로 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 안에서 인도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고유한 목적과 방향으로 이끄시는 것을 일컫는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비교적 쉽게 믿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창조만 하시는가? 아니면 창조 이후에도 하나님 자녀의 삶을 돌보아주시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머리로는 알지만 삶 속에서 경험적인 확신으로 대답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이 두가지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질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과연 그렇게 해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본문은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삶을 인도하신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분명히 방향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보통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에 생각하기 보다는, 현재, 지금 당장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기 바쁩니다. 미래를 논한다는 것이 때론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다 어느날 갑자기 거대한 벽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질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서 준비해놓지 않은 채 갑작스러운 질문을 맞이하게 됩니다.
저희 어머니 친구 분 중에 안경점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실하게 가게를 지켰습니다. 아들 둘 모두 잘 여위고 손주까지 보았습니다. 그러다 몇달 전에 갑자기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삶에서 이미 충분한 열매를 일구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암 소식을 들은 후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너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가게에 앉아만 있었는데 이렇게 되었다며 너무 슬프고 비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말을 우리에게 투영해보면,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 역시도 지금까지 가족, 현실, 상황 등, 나 자신이 아닌 나의 주변요소들, 내가 아닌 다른 부분들만을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만일 갑작스럽게 인생의 거대한 벽을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히 비슷한 생각들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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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갑자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사무엘하 7:18)
이것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인도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유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하던 때 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한번 멈춥니다. 그리고 자기 삶의 방향과 의미에 대해서 처음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은 조금 다른 상황에서 이 질문과 마주합니다. 사실 다윗이라는 인물이야말로 다양한 삶의 순간을 보냈던 인물입니다. 목동으로 살아가다, 광야 생활을 10년,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쫒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후에는 물론 존경받는 왕이 되었지만, 돌아보면 그는 참으로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고백은 다윗이 어떤 인생의 고난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왕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순간에 그는 이 질문과 마주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가고, 다윗이라는 인물도 자신의 인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자리까지 올라갔던 순간에 하나님께 드린 질문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다윗은 자신의 삶이 어려울 때가 아닌, 자신의 삶이 여유 있는 그 때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께 물어봤을까요?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사무엘하 7:18) 다윗은 이 고백을 드리던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의 마음에 가득찼던 그 질문, “내가 누구고, 우리집이 뭐라고,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그 의문 앞에 바로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니면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그는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지난 날의 삶과 과거의 경험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삶을 연결해 봤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잠시 멈춤'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에서 ‘멈춤'의 순간을 가져봐야 합니다. 바쁘게 살아가며 오늘 해야 할 일로만 가득 찬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방향성을 고민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잠시 멈춤의 순간이 우리 삶에 주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다윗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다윗... 형제들 중에 막내이고, 가장 보잘 것 없던 그가 지금은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 되어 있습니다. 골리앗 장군이 속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갈 수도 없어 들판에서 양을 치던 그가 지금은 왕관을 쓰고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니 다윗은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누구길래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셨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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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은 이러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잠시 여러분들의 과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첫 출근, 첫 사업, 첫 출산 등등..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특정 어느 순간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도 풍족하고 감사하게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심을 깨달으며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감사의 고백 앞에 우리는 하나님 인도하심의 손길을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18절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 들어가 앉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삶 속에서 때로 잠시 시간을 내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앉았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겐 이 부분이 중요할지 모릅니다.
A.W 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 스스로에 대해서 잘 모른채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앉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오히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저자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진짜 자아는.. 그것을 찾고 있는 한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 올 것이다.”
이 말처럼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른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신 나만의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로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독특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의 독특성을 내것이라고 여기면 다른 사람과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각자의 독특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로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의 독특함, 은사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함께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윗은 7장 22절에 왕이 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이것은 자기 발견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만 살펴봐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단순한 이 사실 하나로도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하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디자인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을 정하신 분,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는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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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윗의 인생으로 돌아가보면, 다윗의 인생에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였던 대표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싸운 날입니다. 그 날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꾼 날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다윗의 인생을 바꾼 날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에 참가할 수도 없었던 다윗은 어느 날, 형들을 만나러 전쟁터에 가게됩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거인 골리앗에게 겁을 먹은 이스라엘 군인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다윗은 할례받지 않은 저 자가 누구길래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가서 싸울테니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이 말에 사울은 뭐라고 했을까요?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삼상 17:33)
당시 다윗은 체격이 작은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은 2미터가 넘는 거구였습니다. 사울은 단지 눈에 보이는 체격조건만을 보며, 다윗은 싸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땠을까요?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사자나 곰을 내쫓는 정도로 충분히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인 즉슨, 사울왕과 이스라엘 군인들은 골리앗을 거대한 용사로 봤지만, 다윗은 마치 그를 동물과 같은 존재로 여겼음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이러한 생각이 가능했을까요?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단순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셨음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은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에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하나님이 지금껏 지켜주셨으니, 이번에도 분명히 지켜 주실 것이다’라는 고백을 드린 것입니다. 결국 확신에 찬 다윗의 말에 사울왕은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극적으로 소년 다윗이 장군 골리앗에게 나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중요한 결심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것보다 더 큰 결심이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 왕이 준 군복, 갑옷, 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것을 벗어던지는 결심이었습니다. 사실 다윗 시대에 전사는 잘 무장하고 나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당시에도 보여지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였습니다. 특별히 전쟁터에서 갑옷은 전사의 용맹함을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의 경험이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억지로 용감한 장군을 흉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갑옷과 칼을 가지고, 사울인척, 용맹한 장군인척 하기보다, 다윗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바로 그저 다윗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의 칼을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항상 사용하던 물맷돌을 가지고 거대한 장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순간이야말로 다윗이라는 인물의 삶 속에서 가장 빛난 하이라이트의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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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작성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란 문헌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기에 수양대군에 의해서 편찬된 문헌입니다. 이 문헌에서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아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거구의 장군와 싸우면서 가장 자신의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전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인도하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과거에 양떼를 지키던 다윗을 불쌍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하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양을 치고 사자와 곰에게 생명을 위협받던 그 순간마저도 하나님께서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다윗을 훈련시킨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아래, 다윗은 결정적인 순간에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윗의 삶을 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거룩한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서 이끄시도록 해야 합니다.
얼마 전, 저희 아이와 워터파크를 다녀왔습니다. 인공파도를 탈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저희 아이가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 자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물 속에 들어가보니, 그 파도가 자기 생각보다 거세었던 모양압니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는 이내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주완아 왜그래?" 그랬더니 만 5살 어린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겁쟁이야."
만 5세 아이에게도 좌절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로해주었습니다. "아니야, 주완이 겁쟁이 아니야." 그랬더니 저희 아이는 계속해서 "아니야, 나는 겁쟁이야."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야 절대 겁쟁이 아니야!" 라고 말했더니, 그럼 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제가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주완이는 겁쟁이가 아니라, 멋쟁이야!"
저희 아이가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와 함께 파도를 타고 드디어 성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웃으며 또 타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저희 아이의 모습에서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생의 작은 파도에 넘어져 좌절하던 모습, 더이상 용기나 나질 않아서 주저 않아 있던 모습, 나의 연약함에 실망하던 모습이 마치 5살 어린아이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겁쟁이로 놔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멋쟁이라고 불러주시는 분, 바로 그러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나를 비워내는 용기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 분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려움을 자기 훈련의 기회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때로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선한 일을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환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이 나의 고집과 나의 연약함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가서 처음으로 커피를 주문해보는 날이었습니다. 영어로 어떻게 말할지 연습을 해갔습니다. 저는 준비한대로 나름 멋지게 커피 주문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뭐라고 합니다. 미쳐 그 부분까지는 준비를 못해왔습니다. 종업원이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해달라고, 또 다시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커피에 ‘room’이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room'은 우리가 외운 '방'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공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커피 컵을 가득 채우지 않고, 커피에 시럽이든, 우유든 무언가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남겨줄까? 라고 종업원이 물어본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이것이 필요합니다. 때로 우리는 계획이 너무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개입하시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는 'room'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임재와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가득 채워져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지만, 믿음 안에서는 오히려 비워둠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의 계획대로가 아닌, 길이 열리는대로, 나아가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진정한 자기 발견은 나에게 집중할 때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할 때 깨닫게 됩니다. 독특하고 유일한 우리의 지문처럼,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곰곰히 우리를 들여다보고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돌려 우리 인생의 앞으로의 길 또한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확신과 비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분명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우리가 반응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끌고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믿음과 확신, 그리고 비워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는 모든 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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