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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주일설교_"영적전쟁"(출 17:8-16) 본문

주일설교문

삼위일체주일설교_"영적전쟁"(출 17:8-16)

Jake's Blog 2024. 5. 26. 22:35

'관점'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믿음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겨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러한 경험을 하게 하시는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점'이라는 것의 형성은 우리의 '경험'에 근거합니다. 즉,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해왔는가, 지난 날의 경험들이 모여서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이 형성된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보는 관점에 대해 제가 경험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과거 아프리카에 선교를 갔을 때, 현지인 신학교에서 사역을 했었습니다. 신학교가 위치했던 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아 언제나 강도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은 항상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밤이되면 항상 두꺼운 철문을 잠그고 큰 개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만큼 항상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날카로운 철조망을 넘어서 사슴 한 마리가 학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어떤 맹수에게 쫒기다가 학교 안으로 피신해 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학교 안을 뛰어다니는 사슴을 보고 저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야생동물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으니, 혹시라도 학생들이 다치지는 않을지, 어떻게 사슴을 다시 바깥으로 내보낼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일한 상황을 바라보던 아프키라 현지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앗! 고기다!" 라고 외쳤습니다. 평소 고기를 먹기 힘든 학생들에게는 철조망을 넘어온 사슴이 자신들의 양식으로 보였고, 저의 경우엔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야생동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만큼 과거에 어떠한 경험을 해왔느냐가 곧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관점의 차이", 이것은 환경과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떠한 관점을 가져왔느냐가 아닌,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관점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는 곧, 우리는 앞으로 무슨 경험을 해 나갈 것인가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 자녀들이 어떠한 관점을 갖길 바란다면, 거꾸로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애게는 어떠한 경험을 시켜줘야 하는가' 말입니다.

'믿음의 관점'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과 어린 자녀들 모두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8)

 

우리는 보이는 세상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출애굽기에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누구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열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정말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관점을 가진 한 신학자는 모세를 보고 '말을 더듬었던 살인자'라고 묘사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바라보고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었던 살인자' 였던 모세,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을 더듬었던 살인자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때론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다음 기회를 주신다는데 그 은혜가 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하나님께 새로운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 왕에게 나아갑니다. 이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백성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부르심의 목적은 바로 '제사' 곧 '예배'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르심의 목적이 예배라는 것은 말했지만, 예배의 환경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를 탈출해보니 어디에 도착을 했는가 하면, 바로 광야에 도착을 했습니다. 광야는 마치 사막과 같은 장소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마실 물까지도 부족한 곳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광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에서 광야가 가진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의 삶이란, 바로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광야’를 나타내는 단어가 여러개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합쳐서 7개나 됩니다. 미드바르,네게브,아라바, 찌야, 에쉬몬,  에레모스,  에레미야 등이 그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광야에서의 경험이 많았고, 그들의 역사 안에서 기념비적인 사건들이 광야에서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야를 지칭하고 설명해야하는 상황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유로 광야에 대한 표현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에 대한 단어가 많은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광야의 백성’ 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뜻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시온’은 히브리어로 ‘찌욘’이라고 하는데,성경학자들은 ‘메마른 광야'를 의미하는 ‘찌야’에서 온 단어라고 추측합니다. 헬레니즘 시각에서 본다면 광야는 버려진 땅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광야를 ‘버려진 땅’(desert)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시각에서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광야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히브리 단어가 ‘미드바르’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바르’라 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를 ‘드비르’라고 합니다. 

즉, 말씀, 지성소, 광야의 어근이 모두 같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광야를 버려진 땅이라고 하지만, 신앙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광야는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세상 음성에 찌들어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 들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돌아보며 이러한 감상평을 남깁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우리 인생에도 광야와 같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일지 고민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광야는, 우리가 바로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순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광야의 의미를 안다고해도 광야 생활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평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런의미에서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편안하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이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환경적인 것도 있고, 성향 적인 것도 있습니다. 삶의 방식도 있습니다. 나의 옛사람과 익숙했던 것들과의 이별입니다. 그리고 내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객지생활를 하는 우리 모두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인생에 이러한 ‘광야같음'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유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광야 가운데 역사하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인생 가운데서 계속해서 만나시길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름대로 광야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갈 때 쯤, 오늘 본문에서는 예상 외의 적을 만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말렉’ 입니다. 그들은 노예로 누군가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스스로 자신들으루지켜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손자였습니다. 그러니 아멜렉은 에서의 손자로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과는 친척 관계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재산을 빼앗기 위한 목적이 아닌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고(출 16장), 생수를 주신(출 17:1-7) 바로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아말렉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스라엘을 돕는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이것은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습니다. 노예생활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과 싸움을 잘 할리가 없었습니다. 당장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에서 전쟁을 해야하는 상황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하고 절망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덕분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여호와 닛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고, ‘닛시’는 ‘깃발’(Flag)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닛시는 ‘하나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깃발을 언제 사용하느냐, 바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와 무언가를 기념해야 할 때 깃발을 세웁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깃발을 꼽게 하신 하나님,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이 기념할 만한 일을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닛시의 뜻이 바로 ‘승리의 하나님’이 됩니다. 이것을 의역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셨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승리의 하나님 되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살펴보고, 또한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8절을 보시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Rephidim)'에 도착했을 때, 아말렉이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성경에서 특정 지명을 언급하는 것은 그 지역이 특정한 의미를 가질 때, 성경은 그 장소를 언급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르비딤'이라는  장소를 록한 이유는 얼마나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르비딤(Rephidim)' ‘펴다’ 라는 뜻으로 ‘평지’, ‘평야’를 뜻합니다넓게 펼쳐져 있는 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불리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의 경험이 없는 이스라엘로서는 들어오는 길목이 좁거나, 언덕 위에서 싸워야 유리한데, 그저 넓고 평평한 곳에서 싸우게 되면, 정말 각자 자기의 실력대로 정정 당당히 겨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 경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기의 때에, 지도자 모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는 과연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는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젊은 리더, ‘여호수아’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서 아말렉이랑 싸워라. 나는 내일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산 위에 올라가야겠다.” 

 

그의 판단과 결정은 단순했습니다. 싸움을 피하거나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싸우며, 동시에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미하고, 산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다음 10절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을 따르고, 아말렉과 싸우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간 모세는 아론과 훌, 두명을 데리고 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무엇을 했냐면, 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사실은 11절의 내용처럼,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더이상 실력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말렉 입장에서는 산 위에 올라가 있는 모세가 팔을 들고 있는지 내리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압니다. 적어도 아론과 훌까지는 압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이기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모세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손을 들고 있어야죠. 그런데 전쟁이 빨리 빨리 끝나는게 아니고 길어지다보니, 모세가 팔이 아파서 더이상 팔을 들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말렉이 계속 이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와 함께 올라간 아론과 훌은 피곤한 모세를 우선 돌 위에 앉히고, 한명이 한쪽 팔을 잡아 올려서 손을 내리지 못하게 붙잡아 올리게 됩니다. 

12절에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라는 말은 정말 하루 종일 손을 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해본 전쟁에서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14절에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책에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대로 후손들에게 이 사건을 알려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이 사건의 기록을 함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는 이제 산에서 내려와서 우리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주변의 돌들을 모아서 제단을 쌓습니다. 쉽게 말해서 돌 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처음 전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경험되었을까요?
바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감히 내 실력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나를 찾아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승리하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오늘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 삶에서 만나는 어려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렇게 될까요?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 속에 실패하고 절망하고 패배하는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것은 실력으로 따낸 승리가 아니었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따낸 승리가 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손을 들어야만 이겼고, 손을 내리면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손을 드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손을 드는 모습을 언제 볼 수 있나요? 

 

얼마 전에 추용진 집사님, 김희재 집사님네 쌍둥이 아이들 요셉이와 요한이가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엊그제 훈련 중에 처음으로 전화를 사용할 수 있어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받으셨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에 그래도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군대에 가면 새로운 것들을 배웁니다. 그것은 모두 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으로서 전쟁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대 후 곧 총기훈련을 합니다. 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음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수상한 물체나 대상이 나타나면 총을 겨누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아마도 영화같은 곳에서 종종 보셨을 것입니다. 군인이 총을 겨누는 순간, 상대방은 어떻게 하나요? 손을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체포될 때, 포로로 잡혀갈 때 사람들은 손을 듭니다. 그것은 내가 저항하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손을 드는 것은 항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전쟁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아말렉과 싸워야 했습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사실은 항복을 해야만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복의 대상이 다른 것입니다. 아말렉을 향해 항복하고 손을 드는이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었고, 오늘 제목의 영적전쟁의 모습이자 모델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에 적용하자면, 삶에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우리는 먼저 내가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을 해봅니다. 그러다 안되면 나보다 능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되면 포기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사회에서 겪는 싸움이 방식입니다. 그런데 영적전쟁이라는 것은 나보다 힘센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드는 겁니다. ‘하나님, 내 의지로 무언가를 하거나, 세상 권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승리의 비결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구를 향해 손을 드시겠나요?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아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본문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갈 생각을 언제 했는가 하는겁니다. 모세는 좀 싸워보다가 정 안되면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산에 올라가 손을 들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판단을 이렇게 빨리 했는가 하는겁니다.

제가 오늘 서두에 관점 이야기를 하면서 ‘경험'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가 왜 손을 들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광야를 들어올 때 홍해 앞에서 어떻게 할 때 홍해가 갈라졌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는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홍해를 반으로 가르셨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앞부분을 읽어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나옵니다. 그 중에 열가지 재앙이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넘쳐나고, 파리가 가득차는 그런 재앙이었습니다. (피개이파악독우메흑장)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그 때마다 모세는 이미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심지어는 홍해 앞에 가로막혔을 때도 모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자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미 모세는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손을 들 수 있었습니다. 

은혜의 경험은 또 다른 은혜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 항복해서 은혜를 얻은 사람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항복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의 경험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두 손을 들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승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는 삶 속에서의 전쟁에서 항상 이길 수 있게 되는걸까요? 여호와 닛시, 하나님이 우리의 승리 되신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항상 승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패배했던 적도 꽤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도 패배했던 순간들이 많은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승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이 될까요?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승리에 대한 '정의'(definition)이 하나님과 우리가 다릅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승리의 방식이 다릅니다. 세상적으로는 죽임을 당했지만, 사실은 그 방식으로 하나님은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기회되면 나중에 좀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모세가 기도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먼저는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팔을 들 수 있도록 옆에서 붙잡아 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계속 되는 삶의 패배로 한 명이 힘들고 지쳐있을 때,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다시 인도하는 믿음의 친구들, 동역자들, 중보기도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는 진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서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와 함께 최선의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은 다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며 전심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모세는 아무리 팔이 아파도 하나님께서 싸우시기까지 버티는 것, 그것이 승리의 조건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매번 승리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믿는 우리에게 패배란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거나, 아니면 버티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여호와 닛시’로 이름을 짓고, 16절에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대대로, 즉 앞으로 계속 싸우실 것이라고 확신을 하며 오늘 본문이 끝납니다. 여호와 닛시, 곧 승리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지은 모세는 앞으로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오늘 사건을 기억하며,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최근 한 가정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울면서 어떻게 해야하냐고 묻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길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어려운 일을 만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의 모세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버티시기 바랍니다. 주변 친구들에게 중보기도와 도움을 부탁하고, 나의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닛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승리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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