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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제자로 부르심" (요한복음 6장 22-29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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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제자로 부르심" (요한복음 6장 22-29절)

Jake's Blog 2024. 6. 9. 21:06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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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프로그램 중에 '유퀴즈온더블럭'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개그맨 유재석씨와 조세호씨가 연예인과 일반인을 길거리에서 인터뷰하는 방송입니다. 하루는 배우 신하균씨가 출연을 했습니다.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만일 신(하나님)께서 당신의 옆집에 산다면 무엇을 부탁하시겠습니까?"

만일 이 질문을 우리가 받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요? 아마도 마음 속으로 바라고 소망했던 내용들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런데 배우 신하균씨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핵심을 찌르는 우문현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사가지 마세요!" 였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인가요? 신에게 할 수 있는 요청을 일회용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평생 그 신을 내 곁에 두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당연히 응답을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궁극적인 기도는 바로, '나와 함께 해주시옵소서.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지혜와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은 복음서의 한 본문을 살펴보면서 ‘제자'와 ‘부르심'이라는 주제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달라스 윌라드는 자신의 책 ‘잊혀진 제자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관한, 제자들에 의한, 제자들을 위한 책이다.”

 

단적인 예로 “제자"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269번 나오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오직 3번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신약성경은 '제자'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했다고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 함께 사역했던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에 반해, '부르심' 지극히 관계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부르심은 두 주체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부르는 사람, 그리고 부르심을 받는, 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부르심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 선교사 등의 특정 소수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마틴루터가 주장했던 것이 바로 '만인제사장설' 이었습니다. 즉,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 많은 결정을 합니다.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를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궁극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싶은 때에 태어나지 않았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 인생을 시작하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있는 ‘교회’라는 말의 뜻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제자라는 표현은 가끔 사용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그릇된 신화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지 않고도 영원히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 앞에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드리며 응답해야 할 때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제자'의 뜻을 생각해볼 때, 제자와 제자가 아닌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예전에 홍콩영화 이런것들 혹시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술 고수들의 대결에서 한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서 어떤 검객과 겨루게 되었는데, 마치 예전에 자신이 싸웠던 사람과 검술이 비슷합니다. “자네의 검술이 마치 000를 닮았군,,, 혹시 자네의 스승이 000인가?” 

이런 장면이 아마 익숙하실 것입니다.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제자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부분이든 제자는 분명히 스승의 모습을 닮아있고, 그의 가르침이 삶에 녹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주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면, 우리는 과연 얼만큼 주님을 닮아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간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6장입니다. 오늘 본문의 위치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오병이어 사건 직후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를 비롯한 군중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배경을 보면, 사람들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찾아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왜 일까요? 25절을 보시면,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여기서 두 가지 단어를 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랍비'입니다. 랍비는 선생님의 뜻으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긴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언제' 인데요, 언제 여기로 오셨냐는 질문은 곧, 우리도 모르게 언제 오셨냐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의 배경은 그들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찾으려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의 배경인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만났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들은 볼멘 목소리로 25절에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여기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타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하는데 왜 피하느냐란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필요해서 찾아 다녔고 드디어 만났기에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표출된 것입니다. 그들의 감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은 조금은 냉정하게 응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것은 사람들의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오랜 시간 헤매었던 그들의 수고만 본다면 위로의 말을 하셨을만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숨은 동기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6절의 표현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나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이었을까요? 아니면 먹을 떡이었을까요? 

그들이 원했던 것은 분명히 육신의 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그렇게라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사실은 더 좋은 떡이 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아주 간단하지만 강력한 선포였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들이 원하는 떡이 아닌, 다른 떡을 주시겠다는 말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요한복음 6장 66절을 보시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렇게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왜 인가요? 그들은 생명의 양식을 원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양식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원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생명의 떡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와 비슷한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주시려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 동일한 도전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반대 상황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돌려 다른 사람의 편에 섰습니다. 자신에게 더 잘해주는 사람이나,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이 따르는 대상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예수님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더 좋은 대안이 나타나거나, 큰 실망을 하게 되면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무리 전도를 한다고해도, 기독교인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들어오는 만큼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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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가정이 출산을 했을 때, 저희가 뉴욕의 한 병원에서 출산을 했는데, 뉴욕이 워낙 좁다보니, 기본적으로 2인실이 주어졌습니다. 저도 4일 중 3일을 같이 병실에서 보냈습니다. 보조 침대가 없는 방에서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다보니 보통 피곤한게 아니었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산모보다 더 피곤한 얼굴로 걸어다녔더니, 그 미국 병원의 외국인 남자 간호사분이 저의 피곤한 얼굴을 보시더니 정신차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지금 실수하면 평생 가는 것이니 지금 정신 번쩍 차리고 잘 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제가 남편 노릇을 잘 하고 있는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제 주변에 실수했던 남편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네 집은 남편이 병실에서 하루도 같이 안 잤다더라. 또 어떤 집은 남편이 미역국도 끓일 줄 모른다더라 등등. 저는 저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실수담들을 통해서 제가 나름 괜찮은 남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사실을 아시나요? 증명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이미 부족하기 때문에, 나보다 더 못해 보이는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내가 그나마 조금 더 낫다는 안도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비교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비교의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저 집사님보다 예배도 더 안 빠지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니 내가 그래도 신앙은 좀 더 좋은 것 같다는 식의 비교는 우리에게 그 어떠한 영적 유익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부르심' 이라는 것도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더 나은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욱 더 철저하게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부르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헌신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헌금을 드리며, 때로 유투브로 다른 목사님들 설교도 듣고,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는 것으로 나는 나름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웠던 첫 장면이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먼저 하지 않았습니다. 타인들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들의 삶, 말과 행동을 보니, 정말로 그리스도를 닮아 있던 것입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6)

 

정체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그 삶에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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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와 제자가 아닌 자의 차이는 마치 운동경기를 보면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운동경기를 보러가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팀의 유니폼도 입고, 관람석에 앉아서 열정적으로 응원합니다. 자신이 만난 선수에게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어서 그것을 액자에 걸어두기도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에 대해서 알고, 최근 경기 성적까지 알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선수를 위해서 땀을 흘리거나 대신 경기에 나갈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팀의 승리를 위해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지만, 응원하는 팀이 자꾸만 패배하면, 좋아하던 마음이 점점 식어가고, 심지어는 응원하는 팀을 다른 팀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떠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도 넘는 사람들을 먹일 때에는 환호성을 질렀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떡이 아닌, 생명의 떡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직분과도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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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뉴욕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심방을 가고 끝내는 장례까지 치러드렸던 한 집사님이 계셨었습니다. 당시 나이가 62세가 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건강 관리를 잘 못하셔서 몸 속에 폐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가고, 이제는 수술 시기도 놓쳐서 집에만 누워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코에 산소호흡기를 튜브를 꼽고 24시간 누워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욕창이 생깁니다. 하루는 그 집사님 댁에 찾아가서 함께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나누고 짧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심방예배 후에는 짧은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3번째 방문인가 되었을 때, 그 집사님은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20대 젊은 나이에 집사 직분을 받고, 초대교회에 나오는 집사의 역할처럼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전도하고, 다른 교인들을 돌보는 일을 열심히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돌아보면.. 그 때가 참 좋았어요. 참 어렵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제게는 정말 큰 기쁨이었어요. 그런데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하나님 일을 많이 못했는데, 이제 하나님 만날 때가 되니까 그게 가장 아쉬워요. 옛날에는 먹고살려고 하기보다 하나님 일을 먼저 했더니,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혀주셨어요.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먹고 살려고 했더니 사는게 더 힘들어졌어요. 만약에 저에게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이렇게는 안 살꺼에요. 정말 하나님 위해서 열심히 살아볼꺼에요...”

 

그리고 그 분의 장례를 제가 집례하게 되었는데, 장례예배 설교에서 집사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드렸습니다. 상주였던 그 아들이 어릴 때 교회를 다니다가 떠난 형제였는데, 엄마의 이 말을 듣고 장례식 내내 담담했다가,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서까지도 아들을 전도한 것입니다.

저는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진짜로 주님을 잘 믿은 사람일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수 많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아파서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던 이 집사님,, 누가 과연 제자였을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 이기시고 우리 모두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제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 내가 부끄럽지 않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서적을 좀 읽어보신 분들 중에, 아마도 '헨리나우웬'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출생의 예수회 사제이자, 심리학자, 신학교 교수로 여러 명저를 남겼습니다.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10년간 교수를 하고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옮겼습니다. 정말로 그는 신학자로서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무언가 공허하고 혼란스러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장 바니에'라는 캐나다 출신의 영성가인 그의 친구가 헨리나우웬을 한 공동체로 초청했습니다. 그 공동체는 지적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사는 공동체였습니다. 헨리나우웬은 그 공동체에 방문하여 평소와 같이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교수입니다."

"그게 뭡니까?" 

"아..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게 어딥니까?" 

거기서 한술 더 떠서 “그런데 사람들은 왜 공부를 하려고 하죠?” 

 

헨리나우웬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사회적인 모습으로 소개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헨리’라고 부를께요."

그저 그는 그곳에서 ‘헨리’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후에 이 공동체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어떤 설명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나 였을 뿐이다. 내 이름, H.E.N.R.Y.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과 가장 유사한 방식으로 나를 대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다른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의 이름. 나의 존재.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찾는 여정이 바로 믿음의 여정이 된다." 

 

헨리나우웬은 결국 하버드를 떠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 라르쉬 공동체로 가서 지적장애인들을 위해서 그들을 섬기며 청소를 하고, 요리도 해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곳으로 가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집에 왔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분, 장로, 권사, 집사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불리는 직급인 부장, 과장, 대표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딸,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그 부르심 가운데 기쁨으로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어진 매일의 삶 가운데 언제나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든 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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