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book

주일설교(2024.06.30)_"낙심하지 않는 믿음" 본문

주일설교문

주일설교(2024.06.30)_"낙심하지 않는 믿음"

Jake's Blog 2024. 7. 1. 00:49
반응형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10절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예전에 해외출장을 정말 자주 가는 사람, 일년에 많게는 200일을 해외에 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수백번 비행기를 타고, 정말 다양한 나라를 다녔던 분이어서 마침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 갈 때, 혹은 여행의 어떤 일정 중에 가장 설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인천공항 갈 때가 가장 설레요.”

여행이라는 것이 출발과 과정과 마지막이 있는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결론보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도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시길 바랍니다. 처음 순간이 주는 매력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속하는 힘입니다. 무언가를 아무리 많이 시작해도 그것을 지속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때로 결단을 합니다. 삶에서의 경건생활, 봉사, 섬김, 헌신, 선교, 후원 등,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고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도에 포기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데, 그것은 결단을 하는 믿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낙심을 하지 않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공동체에 대해서 말합니다. 낙심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1절부터 보시면, “누군가 범죄하거든…” 으로 시작합니다. 

제가 만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종교인은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학창시절에 일진인 친구가 목사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참 악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사역자의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믿지 않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무언가 허전하고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교회는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끔 교회에서 상처받았다, 실족했다는 표현을 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역을 하면서 참 많은 성도님들을 만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갑자기 연락이 옵니다. 뭔가 느낌이 쎄합니다. 그리고 만나보면, 이제 교회를 못나오겠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물어보면, 다른 누군가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리 달래고 설득해도 안됩니다.  이미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리로는 압니다. 사람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사람은 모두 부족한 존재이다..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된다.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상처를 받는 일이 생깁니다. 왜 입니까?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신앙을 함께 이루어가는 동역자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특별히 초대교회가 세워진 이후 서신서에서 공동체성에 대한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믿는 자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야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어거스틴은 교회는 병원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환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점점 나아가는 환자가 있고, 점점 악화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다른 사람의 실수로 시험에 들지 말고, 나의 믿음을 지키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을 원망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난을 계기로 열심히 노력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한 것이죠. 다른 사람의 실수와 범죄로 인해 시험들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실수한 자를 바로 잡고, 또 스스로 살펴보아 실수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즌 긍휼과 자비, 온유함, 정직함, 단호함 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성품들은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나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서로의 짐을 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 서로의 짐을 지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짐이 무엇입니까? 공동체 안에 서로가 가진 짐들이 무엇입니까?

이제 곧 미국으로 대학을 가는 자녀가 있습니다. 학교생활을 힘들어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교우관계가 어려운 자녀도 있습니다. 군대에 아들을 보낸 가정이 있습니다. 아무리 요즘 군대 좋아졌다고해도, 사건 사고는 항상 있습니다. 1년 반 동안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직장과 사업이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하는 일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 짐을 져야 합니까? 그리고 몸이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가정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진다는 것이 무엇일지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앞의 부분과 대치되는 것처럼 내용이 바뀝니다. 앞아서는 서로의 짐을 지라고 했는데,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서로의 짐을 지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 짐을 막 맡기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짐은 내가 지지만,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질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교회를 네이버지도에 등록을 했습니다. 전화를 진짜 많이 받았습니다. 예배에 관한 문의전화도 있지만, 대부분 계좌번호를 보내고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한번은 보냈는데, 이게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완곡한 거절이라고 하죠. 돌려서 거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주지 않았더니 왜 교회가 이런 것도 안하냐는 말을 제가 참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욕설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실수로 그 전화를 받을까봐 이름을 저장해놨습니다. “받지마"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짐을 짊어지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내 짐은 상대에게 되도록 주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짐은 내가 받아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7절과 8절을 보면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이 나옵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옛 속담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정직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에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했습니다. .

한 친구가 공부를 안합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를 다 나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서울대 갈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가 공부를 굉장히 잘 하는 친구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들어보니 성적이 바닥이라고 합니다.. 서울대를 어떻게 갑니까?

그래서 하루는 그 친구가 금요철야에 나와서 늦게까지 기도하고 밤에 교회 앞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너무 늦게까지 있는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기도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뭐 제가 그걸 모릅니까. 그래도 공부도 시기가 있지 않느냐, 잘 돌려서 말했더니 자기는 서울대를 갈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갈거 아니냐 했더니 자기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서울대를 보내주실거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제가 정신차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지만, 어디까지 기도할 것인가는 고민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이와 관련된 탈무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막에 랍비가 머물고 있는데, 한 유대인이 들어오면서 랍비의 손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존경하는 랍비여, 저는 저의 낙타를 말뚝에 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 제 낙타를 지켜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랍비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장 나가서 낙타를 말뚝에 매고 와라. 하나님은 네가 할 수 있는 일들마저도 능히 해주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되,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 믿음의 균형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아까 말했던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친구 지방대도 겨우 갔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직한 것이죠. 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는 겁니다.

때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굉장히 정직합니다. 심은대로 거둡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현실적인 사회이지만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심은것 보다 더 많이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때로는 심지 않았는대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값 없이 주시는 선물, 곧 은혜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은혜에 감사하지만, 오로지 은혜만을 바라고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시절에, 칼빈(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업이 소명, 곧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긴 일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세상적인 부분을 속박과 굴레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소명이고 사명이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믿음과 삶의 태도는 기독교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무엇을 심을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선한 일들, 믿음의 일들을 계속해서 심어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9절과 10절을 보시죠.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9절과 10절을 보시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 말은 선을 행하고나서 낙심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오고 그 때 무언가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닿는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믿음의 가정들에게는 더욱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공동체 안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일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요?

“당신은 오늘 공동체 안에서 어떤 선을 행하셨습 니까?

 

제가 예전에도 한번 소개했던 영화인데요, 오래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뉴스앵커인 에반이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방주를 만들게 되는 기독교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방주(Ark)를 재해석 합니다. 주인공이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어떻게 방주를 만드냐고, 방주가 얼마나 거대하냐고 묻습니다. 

방주(Ark) = 임의의 친절(선)한 행동 (Action of the Random Kindness)

임의의 친절, 다시 말해 의도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은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기도해주고, 서로 손을 잡아주고, 아이들에게 눈 맞추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 저는 이것이 공동체에서 베푸는 ‘선'이라고 믿습니다.

========

지난 주말에 저희 3명의 목회자들이 워크샵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모이는 시간이 많이 않아서 하루 날을 잡아서 길게 이야기 하자고 해서, 각 가정에 허락을 받아서 1박 2일로 모이기로 했습니다. 저는 마침 아내와 아이가 서울에 가서 시간을 내기 수월했는데, 임목사님이나 신목사님 아이 셋 아빠가 시간을 내는게 괜찮을까 염려가 되어서 물어봤습니다.

"임목사님, 사모님한테 아이들 모두 맡겨놓고 하루 시간을 뺄 수 있어요?"

“네, 괜찮아요 미리 이야기하면 되요. 사역 때문에 모이는건데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목사님께도 똑같이 물어봤습니다.

"신목사님, 사모님한테 아이들 모두 맡겨놓고 하루 시간을 뺄 수 있어요? 막내도 어린데?"

“네, 괜찮아요. 평소에 잘해서 괜찮아요" 

확인되진 않았지만, 저는 '보지 못하고 믿는자가 복되다'는 말씀을 이 상황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제가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남자 셋이 하룻 밤을 묵을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안집사님께서 서귀포 사무실에 딸린 게스트룸을 쓰라고 해주셔서 서귀포 쪽으로 가야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에 얼굴도 모르는 분인데 일을 좀 도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외국인 교사가 살다간 집의 주인분인데, 저에게 대신 무언가를 부탁했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서 흔쾌히 응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주중에 펜션을 운영하느라 어디 다니질 못해요." 

"아 그러시군요. 네 괜찮습니다. 어려운 일 아니었습니다."

"언제 시간되면 한번 오시면 좋은데…"

"네, 나중에 기회되면 한번 뵐께요."

"가만,, 혹시 이번 주에 뭐하세요?"

"아… 제가 마침 숙소를 하나 찾고 있긴 했어요." 

"아 그러세요? 그럼 오세요. 이번 주말에 비어 있어요."

 

그래서 최소비용으로 청소비만 드리는 것으로 하고 갔습니다. 펜션 이름만 받아서 갔는데, 너무 좋은 곳이었습니다. 저희가 찾던 침대 3개가 준비되어 있었고, 넓은 마당에 2층 집, 실내 작은 수영장까지 너무 좋은 곳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런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친절을 베풀었더니 돌아온 것입니다. 돌려 받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닌데, 이렇게 돌아오기도 하는구나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짧지만 풍성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돌려받고 보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기대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선을 행하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면 좋겠습니다.

다만 9절의 표현처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무언가 돌아오지 않고, 때론 시험에 들더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결단도, 그리고 선을 베푸는 것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처음 마음을 가지고 꾸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20대 때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40대가 되고보니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제주에 해녀가 많습니다. 그런데 해녀도 다 똑같은 해녀가 아니라고 합니다. 해녀도 능력에 따라서 등급이 있다고 합니다. 물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해녀를 하군 해녀라고 합니다. 약 3~7미터 정도 잠수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10미터 이상을 잠수하는 해녀를 상군 해녀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녀들 중에서도 특별히 잠수를 잘 하는 해녀들이 있다고 합니다. 15미터 이상을 잠수할 수 있는 해녀들을 일컬어 '대상군 해녀'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녀들은 무슨 차이가 있느냐, 바로 바다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다르다고 합니다.
당연히 수심 5미터와 15미터가 같을리 없습니다. 대상군 해녀들은 훨씬 넓고 깊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녀들은 채취할 수 있는 생물 또한 다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전복 중에서도 사람 얼굴 만한 전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한 장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전복은 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누구만 딸 수 있냐 대상군에 속하는 해녀만 딸 수 있습니다. 단지 물속에만 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더 깊은 세계를 바라보고, 전혀 다른 열매들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대상군 해녀들이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을 아주 단순한 표현으로 옮기면, 그들은 훨씬 숨을 잘 참는다는 것입니다. 즉, 대상군 해녀들은 숨을 잘 참는 해녀, 다시 말해 숨을 오래동안 참는 해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오래 참는 해녀가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믿음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결국 잘 참아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깊은 세계를 바라보고, 삶 속에서 전혀 다른 열매들을 맺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참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참는 것, 인내한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잘 견디고 인내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요즘 무언가 참고 견디는 중이신가요? 그렇다면 낙심하지 말고 조금 더 참고 견뎌보시길 바랍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책에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재해석하면서 인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내란, 포기의 순간을 뒤로 미루는 것'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서 당장 내려놓고 싶더라도, 그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중으로 미루라는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인내'라는 것 그리 대단한 것 아닙니다. 잘 견디고 참는 것입니다. 포기하더라도 내 생각보다 더 나중에 포기할 것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공동체에서 선을 심어가며, 나의 짐을 지며 동시에 서로의 짐을 들어주고자 하는 긍휼한 마음을 품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제 여러분들도 우리 죄를 대신 짊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더욱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