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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새로운 마음으로"(2024.06.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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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_"새로운 마음으로"(2024.06.16)

Jake's Blog 2024. 6. 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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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2장 1-5절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어떤 유명한 식당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구름은 바람 없이 움직일 수 없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아름다운 글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귀 아래 식당 상호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천.순.대."

제 개인적으로 이 식당은 그리 편안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제 아버지의 함자가 박 병 자 천 자 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 식당에 가면, 아버지께서 아재개그를 하셨습니다. '제 이름이 병천인데, 할인이 됩니까?' 저에게 병천순대는 부끄러움이 있는 곳, 별로 가고 싶지 않은 식당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아름다운 글귀를 보았더니, 무언가 제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상쇄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피했던 기억의 장소에서 의외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 의외의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주변을 잘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의외의 아름다움이 존재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로마서를 살펴봅니다. 먼저 로마서의 저자는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신약성경의 절반 정도를 집필하였는데, 그 중에서 로마서는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사역과 선교여행, 옥중의 경험들이 모두 집약되어 쓰여진 가장 신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것이 바로 이 로마서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총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는 크게 1장-11장12장-16장,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은 교리적 또는 신학적 부분이며, 12장에서 16장은 실천적 또는 윤리적 부분입니다. 즉 1장-11장까지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신학적으로 설명했고, 12장-16장은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실천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1-11장은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내용이며, [‘12-16장은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2장 본문을 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자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어떻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한다는 것은 만일 그것이 잘 안되어도, 혹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해도 기다려주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라는 표현을 쓸 때, 이 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오래 참으심, 인내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한다고 할 때, 가장 처음 필요한 성품은 바로 기다림, 곧 인내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바가 있고. 나만의 속도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속도를 맞춰주지 않으면 너무 빠르다? 혹은 너무 느리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빨리 자라길 원한다며 매일마다 엄청난 양의 물을 주면 어떻게 될까요?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오히려 썩게 됩니다. 아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들은 이유식을 먹고 그 다음 밥을 먹습니다.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특별히 성인들끼리 잘 기다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돌아오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로마 교인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지냈습니다. 제사에는 당연히 동물이나 곡물과 같은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바치는 제물은 당연히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구약시대 제사의 모습

바울은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은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몸이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내 뜻이나 내 주장이나 내 의지를 모두 비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의 제사와 오늘날의 예배를 함께 생각해볼 때, 우리가 제물이 된다는 것은 제사에 바쳐진 동물이 모두 죽었듯이, 예배는 나를 죽이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내가 온전히 죽어야만 말씀 안에서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합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의미는 살아있지만 주님을 따르는, 주님 뜻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고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는 '예배'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대면 예배’, ‘비대면 예배’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겼습니다. 이 사태가 있기 전까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습니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고, 예배당에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온라인상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에 비하면 복장, 태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 모잠비크라는 나라를 한달 동안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아공 옆에 붙어있는 나라인데, 못사는 나라여서 남아공에서 당시 노동자 하루 일당이 8천원 이었는데, 모잠비크 사람들은 5천원만 준다고 해도 줄을 섰습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였습니다.

 

저는 모잠비크의 수도인 마푸토라는 도시에 갔습니다. 그래도 수도이다보니 관광안내지도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 하나를 받아들고, 선교관에 들어와서 지도를 펼쳤습니다. 어디를 가볼까 여기저기를 살피던 중에 한 초밥집 식당이름 밑에 연락처가 한메일넷, 지금의 다음넷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는겁니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역시 한국사람이 주인이었습니다. 서로 놀랐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왜 여기 있으세요?' 그 분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여기 왜 오셨어요?'

 

그런데 거기서 식사 중인 한 중년 남성 분이랑 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 분도 믿는 분이었는데 주일 오전에 자신의 집에서 믿는 가정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면서 저희를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3가정이 모여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잠비크 마푸토에 총 한인 10가정이 살고 있는데, 3가정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 분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요? 함께 찬송을 부르고 대표기도를 하고, TV를 틀었습니다. 설교영상을 함께 시청한 것이죠. 제 인생에 처음드린 온라인 예배였습니다.

당시 극동방송에서 선교사후원사업으로 안테나를 설치해줘서 이렇게 볼 수 있다면서, 그 전에는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과연 어떤 예배가 더 신실한 예배일까요?  결국은, 예배가 대면이냐, 비대면이냐 하는 것보다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 예배를 ‘성령의 예배’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λογικην)’]은 ‘성령, 혹은 영’이 아니라 ‘말씀’을 의미하는 [‘λογος(로고스)’]의 형용사로 reasonable 즉, '합리적인', 그리고 based on the Word of God, '말씀에 근거한’ 이란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즉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하는 우리 삶은 ‘합당한 삶’, ‘말씀이 근거가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살아내야 할 예배자의 삶을 뜻합니다. 따라서 ‘영적 예배’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바울은 2절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절의 뜻은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행한 삶의 모습 중에 하나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남들이 원하는 것을 쫒아가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대로 그 목적을 발견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도 우리는 똑같은 삶의 환경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믿음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과정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건강검진을 하면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도 보통 새해가 되거나, 아니면 어떤 일이 있을 때, 잘못된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거듭나겠다고 결단하곤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작심삼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우리가 거듭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나를 비울 때만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택한 선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인가 질문합니다. 그리고 내가 택한 선택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는가 아니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를 살펴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택한 선택이 선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b.  ‘마땅히 생각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라.' 즉,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증에 있습니다. 만일 오늘 예배 드리고 집에 가다 교통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지?  내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남쪽으로 이사를 가야하나? 등입니다. 하지만 불안증 이면에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을 내가 어떻게든 대비하고 통제해보려는 마음이 그 안에 깔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맡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2명의 제자들 모두가 주님을 향한 믿음이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내가 얻을 것이 없네? 그러면 최소한의 것이라도 얻어야겠다. 그는 그렇게 은 30냥에 주님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너무 많은 생각은 주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바울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을 생각해보라고 또 한가지 이유는 성화의 과정,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 모두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김새가 다르듯 우리 능력도 모두 다릅니다. 저 사람에게는 있고 내겐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만큼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4-5.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고 있고, 각자 다른 능력을 지닌 우리가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다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의 순기능은 서로를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해주고, 어려운 일에 함께 슬퍼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어려움을 만나면 서로 위로를 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 근데 모든 일은 쌍방이야. 너를 돌아봐. 너도 뭔가 실수한게 있지 않을까? 그 사람에 괜히 그러진 않았겠지, 빨리 잊어버려. 너를 위해 하는 말인거 알지?' 이렇게 말합니다. 전혀 위로가 안됩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위하는 사람인 것을 알지만 그 말이 그리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 그사람 진짜 나쁜 사람이네, 어쩜 그럴 수가 있어. 내가 혼내줄까?' 라고 말합니다. 별것 아닌 말에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 말에 위로를 받을까요? 둘다 우리를 위해서 말한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는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해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한 몸을 이루어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받아주는 것을 뜻합니다.그것은 바로 있는 그대로, 혹은 보여지지 않는 모습까지도 모두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친구 중에 한 명이 삼성에 다니는데, 몇년 전 저희 아이 100일 때, 제가 휴가로 잠시 한국에 들어와서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결혼식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서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번에 부장으로 진급을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안해봐서, '부장이 보통 언제 되는거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제 친구는 '아직 입사 선배들 중에 두 학번에 높은데도 아직 과장인 선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잘 된거네?' 그런데 그 친구의 대답이 의외입니다.

'선배들 일시키기도 어렵고, 나만 일이 더 많아지는 거지. 집에 더 늦게 들어가는거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보통 남자들이 이런 반응을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승진했어?' 라고 물어보면, '남들 다하는거지, 일만 더 많아졌어' 이렇게 대답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왜 안기뻐하지?' 생각해보면, 사실 승진한 그 자체가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않습니다.나의 기쁜 소식을 함께 축하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기쁜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공동체 안에도 축하할 일이 있습니다. 영광형제, 혜선자매 가정에 새생명이 찾아왔습니다. 새생명은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현재 우리 막내들, 이준이와 선하가 막내로 사랑받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 둘에게도 동생이 생겨서 올해 말에는 우리 모두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 같습니다. 많이 축하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5절까지만 살펴봤지만, 이후로 좀 더 읽어나가다보면 15절에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이 구절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던 때가 언제인지 혹시 기억 나시나요? 벌써 10주기가 지난, 바로 세월호 사건 때,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가끔 '세.월.호.'라는 단어 자체가 정치적 언어로 사용되는 때가 종종 있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수학여행을 갔던 자녀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건을 경험한 부모님들을 생각해보면 정치적 이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제가 뉴욕에 있을 때, 안산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이 뉴욕을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에 세월호 가족들이 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유가족들만 모시고 뉴욕으로 방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맨하탄 도시여행 가이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다니는 모든 순간에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한번도 그 분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아이가 어떻게 되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태어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너무 예쁘겠네... 예쁘죠?   잘 키우세요.  많이 놀아주세요.  난 많이 놀아주지 못한게 너무 속상해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한한 시간을 주셨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합니다. 오늘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 너무 잘하셨습니다. 예배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오늘은 다른 길로 한번 가보십시오. 새로운 경치를 보시고, 옛날 추억도 나누십시오.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오신 분들, 오늘 아이들 예배 잘 드렸으니 맛있는 것도 사주십시오.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십시오.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것인지를 깨닫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새로운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마음을 너희 속에 두고 새로운 영을 너희 속에 두리니" - 에스겔 36:2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17



흑인 인권운동을 했던 마틴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은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란 갈 길을 다 보지 못해도 첫걸음을 내딛는 용기입니다.” 

 

우리 믿음생활은 보여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보이지 않아도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날마다 새로운 날들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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